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전통과 근대화의 충돌사이에서 표류하는 인간들의 삶
[일요서울 | 박찬호 기자]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서울인구 240만에 개봉극장 3개이던 1958년 육군대위 계급장을 달고 영화의 거리 충무로에 등장했던 홍안의 감독. 다재 다능으로 후학들을 이끌며 우리 영화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해온 감수용 감독. 필름의 생명은 100년이라지만, 200년, 300년 후세에 까지도 그의 명작 필름들과 더불어 살아서 빛날, 감수용 감독을 만나본다.
김수용 감독(86)은 지난 1958년 국방부 정훈국 소속 육군 대위라는 직책으로 군 영화를 제작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같은 부대 대위로 재직 중이던 소설가 선우 휘 선생은 김수용이 영화감독으로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영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 군인 신분으로는 만들 수 없는 영화를 군 영내가 아닌 밖으로 나가 제작을 했다. 이때 만든 작품이 김수용 감독의 데뷔작인 ‘공처가’였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군인 신분으로 영화를 만든 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우 휘 선생은 김수용 감독의 탁월한 영화 연출 능력을 믿고 특별히 배려를 했다. 김수용 감독은 이후에도 군인 신분으로 ‘삼인의 신부’ ‘구혼 결사대’ 등 두 편의 희극 영화를 비밀리에 제작했다.
그는 “당시 시대 상황이 암울했기 때문에 희극 영화를 제작하는 것 밖에는 생각 할 수 없었습니다”며 배경을 설명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29살. 8년여에 걸친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뒤 김수용 감독은 68년까지 3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한편의 영화가 끝나면 또 한편의 영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영화를 찍었습니다. 쉼 없이 영화 제작 현장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너무나 큰 행복이었습니다.”
초기 희극 영화를 찍던 김수용 감독은 영화의 맛을 알게 된 후 문학 작품에 대한 영화에 매료 됐다. ‘영화와 문학의 접목’ 이를 위해 영화감독으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내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만을 고집했다. 그가 처음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은 ‘여자의 일생’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모파상의 ‘첫사랑’이었다. 이후 문학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30여 년 동안 그가 만든 109편의 작품 중 50여 편에 다다른다.
현진건의 ‘무영탑’, 이광수의 ‘유정’, 김유정의 ‘봄봄’, 이효석의 ‘분녀’,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네’, 김동리의 ‘까치소리’, 최인호의 ‘내 마음의 풍차’,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 박경리의 ‘토지’, 김용성의 ‘화려한 외출’, 토마스 하디의 ‘테스’,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 등 주옥같은 문학 작품을 영화화 한 김수용 감독은 이 때문에 한국소설가협회로부터 ‘문학적인 감독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수용 감독이 평생 영화감독으로 살아오면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지난 1986년 그가 중광 스님의 삶을 영화로 제작한 ‘허튼소리’가 심의에 걸려 12군데나 가위질을 당했다는 점이다. 당시 공연물영상진흥협의회(공진협)가 ‘대중의 교란 목적을 가진 위험한 영화’ 라는 검열의 잣대를 들여댔기 때문이다. 김수용 감독은 이에 항의하기 위해 영화 감독직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김수용 감독이 선택한 일이 81년부터 연극영화과 교수로 나가면서 연을 맺었던 청주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김수용 감독은 86년부터 교수로 학교에 출강을 시작했다. 교수 활동부터 시작하면 김 감독은 15년이 넘게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셈이다. 그가 배출한 학생이 줄잡아 5백 명은 된다.
김수용 감독은 97년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 일본에서 영화 제작 제의가 들어 온 것이다. ‘사랑의 묵시록’ 이라는 작품이었다. 그는 일본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 정일성 촬영감독과 함께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인들 배우와 일본 자본으로 탄생된 이 영화는 당시 30만 관객을 끌어 모았다. 히트였다. 김수용 감독은 “당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고 회고했다. 김수용 감독은 그동안 1백편이 넘는 작품을 만들어 오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영화로는 신영균, 고은아 주연의 ‘갯마을’ 신성일, 윤정희 주연의 ‘안개’와 신영균, 조미령의 주연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꼽았다.
‘갯마을’은 66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부일영화상 감독상을 받게 했다. ‘안개’는 67년 아시아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타게 해준 작품이었고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당시 서울인구 3백50만의 10%에 달하는 30만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김수용 감독은 요즘도 일주일에 2〜3편씩 영화를 본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지는 않는다. 이처럼 많은 영화를 접하기 때문에 그는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가 뜰 수 있다 없다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김수용 감독이 성공 가능작으로 본 영화는 이정향 감독의 영화 ‘집으로’와 김동원 감독의 ‘해적 디스코왕 되다’였다. “영화를 보고 난 뒤 확실하게 성공하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너무나 느낌이 좋았거든요.” 김수용 감독의 말대로 영화 ‘집으로’는 4백만이 넘는 관객이 극장을 찾았고 ‘해적 디스코왕 되다’도 선전을 했다.
김수용 감독은 국내 영화산업과 게임 산업 중 향후 발전 가능성이 더 커 보이는 산업은 어느 쪽이라고 보냐는 질문에 영화 못지않게 게임은 투자액이나 수요를 볼 때 그 가능성이 문화산업 중 가장 크다고 내다 봤다. 그러나 그는 게임 산업이 더욱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정부에서 가이드라인 등을 지정하고 영등 위는 외설이나 폭력성의 수위 조절 을 해 나가는 등 조화롭게 산업을 발전 시켜 나가려고 노력해야만 지금 보다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수용 감독의 취미는 정원수를 가꾸는 것이다. 현재 서울 장충동에 살고 있는 김 감독은 60년 동안 이사를 다닌 적이 없다. 때문에 6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해왔던 정원수는 그에게 있어 가족이나 마찬가지로 소중한 존재들이다. 김수용 감독의 문화산업에 대한 철학이 궁금했다. “문화는 수치가 아닙니다. 또 문화는 과학이 아닙니다. 일종의 과학이나 상식에 의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창조에 의해 접근해야 합니다. 문화는 창의성을 바탕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문화는 새로운 것을 향해 자유롭게 발전해야 합니다. 국민들의 문화산업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지금처럼만 이어지고 개발시키려는 정책이 어우러진다면 우리 문화산업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문화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반드시 보장 돼야 합니다.”평생을 문화 예술인으로 살아온 그답게 문화산업에 대한 철학과 소신이 그 누구 보다 뚜렷했다.
문예영화의 전성기를 탔던 60년대, 영화사에서 의뢰 받은 의무 제작의 수혜자였던 한편으로 실험적인 모더니즘 영화를 추구했던 70년대, 그리고 사회 비판 영화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80년대를 거치는 동안 김수용 감독은 꾸준히 많은 영화를 찍었다. "영화를 많이 한 게 결코 자랑은 아닙니다. 자기 경력 관리에는 치명적입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어디 스튜디오에 소속되지 않은 감독들에게 충무로의 영세자본 제작자들이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 거절을 못했습니다. 저 사람 잡으면 기한 내에 영화 나오고 제작비 초과 안 하고 그러면서 흥행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를 많이 만든 해에 오히려 작품이 더 괜찮았다는 것입니다. 67년 <안개>, <까치소리>, <만선>을 했는데 수준이 다 괜찮았습니다. 같은 스텝으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영화를 찍었으니까요. 정신력과 조직력이 좋았습니다. 영화에 대한 연구와 팀워크가 중요하지 시간이 많다고 좋은 건 아닙니다. 물론 변명하고 싶진 않지만요."
김수용 감독은 스스로 58년부터 2000년까지 4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영화를 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영화에 대한 감을 놓치지 않고 지키려 늘 애썼습니다. 이런 것 안 했으면 하는 작품은 물론 있습니다. 그래도 용서하는 게 그 작품을 통해서 영화에 대한 확신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김수용 감독은 관객 취향에 맞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원칙이 몸에 배어 있다. 80년대의 사회파 영화는 아마도 당시의 그런 시류를 그가 본능적으로 받아들여 이해했지만 영화적 숙성에는 실패했던 것의 반증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외국 문물의 영향을 받아 변해 가는 사람들의 얘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얘기"를 찍었다.
김수용 감독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어법과 반영적인 모더니즘 스타일을 오가면서 전통과 근대화의 충돌 사이에서 표류한 인간들의 초상이 있었다. 개발 독재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제도가 한국영화에 요구한 것은 근대화에의 의지였지만 김수용 감독은 문예영화와 목적영화와 계몽영화를 두루 만들면서 어떤 식으로든 근대화의 국가적 의지가 억눌렀던 개인의 삶의 불안한 실존적 틈을 잡으려 애썼다. 그 틈이 풍요롭게 벌려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지만 그 틈 사이에서 말할 것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chanho227@ilyoseoul.co.kr
박찬호 기자 chanho2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