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박정희 대통령 때 만든 지하벙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쓰여
[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박정희 대통령 때 만든 지하벙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쓰여
  • 조아라 기자
  • 입력 2015-03-16 10:37
  • 승인 2015.03.16 10:37
  • 호수 1089
  • 6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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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박물관 이전 숨겨진 비밀

우리나라는 5000년의 긴 왕조문화를 지켜온 나라다. 그런데 그 긴 역사문화를 보존하고 소개할 박물관 하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청와대 교문수석실 김정남 수석에게 “경복궁 서남쪽 모퉁이에 들어서있는 옛 정부 후생관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조선왕궁 박물관을 건립하는 게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리고 “거기 우선 중앙박물관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전시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총독부를 철거도 하고, 새 박물관도 건립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고 전했다.

그랬더니 김 수석은 흔쾌히 받아드리며 “나도 도울 것”이라며 “장관과 협의해 확정하고, 예산확보에 주력해 건물 설계와 사공에 만전을 기해 달라”는 당부도 들었다. 그래서 겨우 남아있는 왕실 유물을 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 할 수 있는 지금의 고궁박물관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지어졌다. 

1996년부터 2004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은 거기서 전시 조사·교육 업무, 용산 신축박물관 건립사업 수행, 중앙청 철거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수천억 원을 들여 그 위대한 석조건물을 철거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건물을 그대로 지하에 보존하는 방안은 없는지 공격을 계속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궁박물관으로 이전 시 전시유물과 사무실과 수십 만 점의 유물을 옮겨야 하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정식 신축된 박물관 완공되면 또 다시 유물을 옮겨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생기는 사고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문제제기를 했다. 따라서 이들은 중앙청 건물을 그대로 두고, 신축 박물관을 세운 뒤 이전하자고 주장했다.

여기서 일반인은 물론, 박물관 관계자도 잘 모르는 사연이 있다.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일부 박물관 관계자들은 이를 왜곡해 선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 중앙청에 박물관이 옮겨 왔을 때 건물 동쪽에 넓은 광장이 있었다. 지금도 그 광장은 주차장으로 이용 중이다. 이 주차장 지하에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만든 비밀벙커가 있었다. 국가 비상사태 발생을 대비해 원자탄공격을 견딜만한 벙커에서 정부요인의 비상대책회의와 기밀문서보관 등 전시대비 업무를 준비한 곳이다. 지하 10m쯤 아래 철근 콘크리트로 2m 두께의 천장을 만들고 이중 삼중 철문 출입구와 제반시설이 잘 갖춰진 벙커다.

중앙청 청사로 이사 오면서 1600 평이나 되는 지하벙커를 수장고로 개·보수해 수장고로 사용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처음으로 견고하고 보존환경이 개선된 넓은 수장고를 확보한 것이다. 불편한 점도 있었다. 출입구가 두 곳이었는데 하나는 바로 지하벙커의 서쪽출입문이었다. 이곳은 계단과 지하경사로를 이용해 지하로 들어가게 돼있었다. 동쪽에도 출입구가 있는데 이는 경복궁 동쪽 담장 앞이었다. 이곳은 철문을 열고 트럭이 들어가야만 했다. 그 뒤 또 다시 철문을 두 번 열어야만 창고 앞까지 갈 수 있었다. 대형유물은 주로 이 통로를 이용했다.

현재 민속박물관 창고도 같은 지하이다. 지금은 전시 비상사태에 대응하는 등의 시설은 없다. 전기실, 변전실, 기계실 등이 함께 있고, 면적도 좁다. 또 지하에 물이 고여 있어 습하는 등 여러 가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벙커를 개조한 창고는 넓고 시설이 잘 돼있고 안전했다. 수장고의 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셈이다. 문제는 지하 수장고의 이용이 어렵고 번거로웠다. 

서쪽 출입구는 계단이 있고 경사가 있어서 유물을 일일이 상자에 담아 사람이 들고 옮겨야 했다. 동쪽 출입구는 차로 유물을 옮길 수 있으나 미리 직원이 들어가 안에서 문을 열어줘야 들어갈 수 있었다. 또 유물을 싣고 밖으로 나오면 바로 본관 유물부나 전시실로 올 수가 없었다. 경복궁 동문으로 나가 청와대 앞이나 광화문 앞을 돌아 경복궁 서문으로 들어와야만 유물부나 전시실로 유물을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하 수장고는 안전했다. 때문에 중앙청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을 조선왕국박물관으로 중앙박물관이 이전한다 해도 큰 문제가 되기 않았다. 전시유물과 사무실만 옮기면 됐기 때문이다. 수십 만 점의 유물은 그대로 안전한 지하 수장고에 보관하면 됐다. 박물관이 임시로 어느 청사로 가던 유물의 안전에는 이상이 없던 것이다. 

이러한 철거 찬반 와중에도 본인은 새 박물관을 지을 부지를 찾아야 했다. 고궁박물관은 경복궁 경관과 잘 어울리게 한옥으로 지어야 했다. 새 박물관 부지가 확보되면 설계확정 예산확보 등의 중차대한 문제들도 있었다.

▲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청화백자 어초문준

보물788호 / 15세기 전반 / 높이 24.7cm 저경12.4cm

조선조 백자에 코발트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는 이미 15세기 전반기에 시작됐다. 그러나 그 실물이 귀해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그 실상을 알기가 어려웠다. 여기 소개하는 청화백자 어초문 준은 15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것이다. 바로 지난번에 소개한 청화백자매죽문준(국보219호)와 거의 같은 시기의 것으로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문양구성은 내경한 구부상하에 횡선이 있고 그 가운데 중원권문이 있다. 어깨와 굽 위에는 다른 모양의 연판문이 있어 종속문이 삼단으로 구성됐다.

주문양구성은 동체양면에 크게 능화형을 나타내고 능화형 사이 양옆 여백에는 반능화형을 아래위로 배치했다. 능화형과 반능화형 사이에 자연스럽게 능형의 공간이 생겼다. 주문양은 능화형내에 약동하는 큰 잉어와 피라미가 있다. 초문(여뀌)도 있고 반능화형에도 송사리와 초(여뀌)문이 있다. 이 사이의 능형에는 연당초문이 있다.

그러고 보면 동체의 능화형내의 연당초문은 종속문으로 볼 수도 있어 종속문이 사단일수도 있다. 이렇게 종속문이 여러 단이고 기면에 문양으로 가득한 것은 원 명초 청화백자의 영향이다. 그러나 이 준의 그림은 회화적으로 필치가 부드럽고 자유로워 문양이 수더분하다. 조선조 청화백자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주문양의 잉어가 약동하는 모습은 등용으로 과거에 급제함을 뜻한다. 피라미는 젊었을 때를 상징하고, 여뀌는 학업을 잘 마쳤다는 뜻이다. 즉, 젊어서 학업을 잘 마치고 과거에 합격하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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