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취재-사람 먹는 블랙홀? ‘거제시 실종 미스터리’
추적취재-사람 먹는 블랙홀? ‘거제시 실종 미스터리’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9-10-27 14:34
  • 승인 2009.10.27 14:34
  • 호수 809
  • 5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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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없는 살인의 밤’ 파멸의 자살극으로 끝났다
지난 9월 30일 경찰이 굴착기를 동원, 유력한 용의자 K씨의 집 인근을 수색하고 있다. 그러나 시신 등 범행과 관련된 흔적은 찾지 못했다.

고즈넉한 바닷가 시골마을이 ‘사람 먹는 블랙홀’이라는 오명을 쓸 위기에 처했다. 경남 거제시 사등면 청곡리. 산자락을 낀 조용한 바닷가 고장을 중심으로 10여 년 간 7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사라진 것.

지난 96년 부면장의 아들이었던 A씨(당시 37세)가 흔적도 없이 종적을 감췄고, 지난 2004년 1월에는 이 지역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던 P씨 부부와 초등학생 아들 등 일가족 세 명이 함께 차를 타고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지난 8월 26일, 청곡리에서 차로 약 15분 정도 떨어진 장평동에서 50대 부부가 사흘 간격으로 실종됐다. 이후 한 달여 만인 지난 9월 30일 이번엔 부부에게 세를 준 집주인 K씨(55)가 트럭에 탄 채 바다로 돌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한 K씨를 제외하고 나머지 실종자들은 소식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 발견되지 않았다.

주목할 것은 숨진 K씨가 일련의 실종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K씨는 부부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거짓말탐지기 수사를 앞둔 상황이었다. 또 주민들 사이에서는 13년 전 사라진 A씨가 그를 만나러 나간 뒤 사라졌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미궁에 빠진 ‘거제시 실종 미스터리’. 과연 K씨는 ‘시체 없는’ 연쇄살인범일까, 아니면 억울한 누명에 죽음으로 결백을 주장한 소시민일까. 사건의 내막을 집중 취재했다.

연이은 실종사건 끝에 벌어진 유력한 용의자의 자살. 한국판 ‘범인 없는 살인의 밤’(日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作)은 결국 미제로 남을 것인가.

먼저 지난 8월 26일~28일 사이에 차례로 사라진 장평동 50대 부부 실종사건부터 들여다보자.


단칸방서 나온 피 13방울

실종된 남녀는 박모(50·백화점 임시직)여인과 김모(49·일용직 노동자)씨로 이곳 K씨 소유의 2층짜리 건물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박 여인은 재작년 남편과 헤어진 뒤 김씨를 만나 동거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의 실종 신고가 처음 접수된 것은 지난 9월 1일, 부산에 사는 박 여인의 딸이 “엄마의 휴대전화가 사흘 전(8월 28일)부터 꺼진 채 연락이 안 된다”며 경찰에 도움을 청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은 박 여인이 살던 월세방에서 부서진 박 여인의 휴대전화와 콩알만 한 핏자국 13점을 발견했다. 핏방울은 방바닥과 화장실, 가장자리가 깨진 변기 등에 떨어져 있었다.

“김씨가 술에 취하면 늘 부인(박 여인)에게 욕설을 하고 주먹을 휘둘렀다”는 이웃주민들의 증언에 경찰은 우선 동거남 김씨를 1차 용의선상에 올리고 내사를 벌였다. 그러나 약 1주일 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혈흔 감식 결과가 나오자 수사방향은 급격히 꺾였다.

국과수 감식에 따르면 방바닥에서 발견된 핏방울은 박 여인의 것이었고 화장실에서 나온 핏자국은 다름 아닌 집주인 K씨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 여인 뿐 아니라 김씨 역시 수사가 진행되는 내내 행방이 묘연했다. 누군가 두 사람을 해치고 시신을 유기했을 것이란 추리가 가능했다.

사건을 담당한 거제경찰서는 일단 K씨를 참고인 자격으로 불러들였다. K씨는 경찰에서 “8월 27일 김씨가 동네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다 오락기를 부쉈고 나중에 오락실 직원들 3명이 집에 찾아와 난리가 났었다. 그 뒤 부부가 심하게 다투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마지막 순간, 경찰과 추격전

K씨는 박 여인의 화장실에서 자신의 피가 나온 것에 대한 해명도 잊지 않았다. 그는 “다음날 윗방에 올라가보니 살림살이가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이를 직접 치우다 미끄러져 넘어졌고 왼손 약지를 깨진 변기에 베었다”고 설명했다. 일목요연한 진술이었다.

그러나 박 여인이 실종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인물이 바로 K씨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수사팀은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건 당일로 추정되는 날 박 여인과 김씨가 심하게 다투는 것을 봤다는 K씨의 목격담도 믿을 수 없었다. K씨 말고는 아무도 그날의 실랑이를 봤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수사팀은 K씨를 상대로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경찰의 제안을 K씨도 받아들였고 검사는 9월 25일 경남경찰청에서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K씨는 이날 경찰청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른 아침 말도 없이 집을 나간 그가 다시 나타난 건 이틀 뒤인 9월 27일 새벽.

술에 취한 K씨는 새벽 5시 30분쯤 부인에게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1톤 트럭을 몰고 집을 나섰다. K씨의 부인으로부터 이 사실을 확인한 경찰은 길목마다 경찰인력을 풀어 그를 수소문했다.

마침내 이날 아침 7시 반 경 K씨는 집에서 25km 정도 떨어진 하청면 하청삼거리에서 순찰차와 맞닥뜨렸다. 위기를 느낀 걸까. 그는 황급히 장목방면으로 핸들을 꺾었고 경찰과 필사의 추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청실전매립지 쪽으로 달아나던 K씨는 실전여객선 선착장에 이르자 마지막 선택을 하고 말았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던 K씨의 트럭이 바닷물로 돌진해 거꾸로 처박히고 만 것. 당연히 뒤따르던 경찰들은 그를 구조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안쪽으로 단단히 잠긴데다 수직으로 순식간에 가라앉는 트럭을 맨손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신이나 찾게 해주고 가지…”

K씨의 자살이라는 돌발변수 앞에 수사팀은 망연자실한 상태다. K씨가 박 여인 부부를 해친 진범이라는 정황증거와 심증은 뚜렷하지만 결정적인 물증, 즉 시신과 흉기가 나오지 않은 탓이다. 바다에서 건진 K씨의 트럭에서 깨끗한 낫과 식칼 등이 나왔지만 피해자의 흔적이 발견될지 여부는 미지수다.

경찰은 추석 직전인 9월 말과 10월 중순 굴삭기와 탐지견 등을 동원해 K씨의 집과 인근 야산에 대한 대규모 수색작업을 벌였다. 하지만 시신은 커녕 일말의 단서도 건지지 못했다.

거제 경찰서 관계자의 탄식 섞인 한 마디는 사건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음을 시사했다.

“시신 숨긴 곳이라도 가르쳐주고 가지 그랬나. 이제 와서 시신이 나온다 해도 그를 범인으로 단정 지을 마지막 연결고리가 없어졌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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