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Ⅰ오두환 기자] 최근 박근혜 대통령을 비방하는 전단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등장한 이 전단들은 서울 시내는 물론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에서 수백, 수천 장씩 뿌려지고 있다. 전단에는 주로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 파기와 국정원 대선 개입 등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SNS시대인 요즘 과거의 시위도구였던 전단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건조물 침입·재물손괴·경범죄 처벌법 등으로 처벌 가능
여당 “국론 분열시키려는 세력들에 대한 대책 필요”
전단은 흔히 ‘삐라’라고도 불린다. 과거 유신시대나 일제 강점기 때 스마트폰, 인터넷 등이 없던 시절 중요한 의사전달 수단이었다.
하지만 삐라가 주는 이미지 자체가 상당히 부정적이다. 과거 삐라를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았던 유신시대의 기억이나 북한에서 보내온 전단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삐라의 어원은 일본에서 유래됐을 가능성이 높다. 벽보나 광고지를 뜻하는 ‘bill’의 일본어 발음이라는 주장과 펄럭인다는 의미의 일본어 ‘비라비라’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일본 메이지 시대에 별장을 의미하는 ‘villa’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도 있다.
전단 살포
조직적으로 변화
지난해 말부터 뿌려진 전단은 내용도 주체도 바뀌고 있는 모양새다. 전단 살포 초기 일부 개인이나 시민운동활동가가 단순히 박 대통령을 조롱하기 위해 전단을 제작해 배포했다면 최근에는 뜻을 같이하는 단체가 조직돼 다양한 정책 현안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개인이 아닌 단체에 의해 전단이 처음 살포된 것은 지난 2월 25일 이었다. 이날은 박 대통령이 취임 2주년을 맞는 날로 낮 12시쯤 청와대를 시작으로 마포구 신촌 로터리 인근까지 약 1500여장의 전단이 뿌려졌다.
이날 전단 살포를 주도한 단체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들은 특정 단체에 다 같이 모여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며 새롭게 단체를 만든 것도 아니라고 밝혔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은 임시명칭이라고도 밝혔다. 자신들 중 일부는 소시민이라며 간혹 집회에 참여하고, SNS를 통해서 알게 된 몇몇이 함께 기획하게 된 일이라고 전했다.
시작은 대통령 비난
지금은 정책 비판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을 비롯해 전국에서 뿌려진 전단의 내용은 비슷비슷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박 대통령을 희화하는 그림이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에 뿌려지는 전단들은 대부분 정책 비판이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은 여러번 전단을 살포했는데 첫날 뿌린 전단에는 박 대통령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사진을 배경으로 국정원 대선개입 유죄판결 관련 기사 내용이 포함됐다. ‘공직선거법 위반, 국가정보원법 위반, 모두 유죄판결’, ‘국정원 대선개입, 불법부정선거 의혹 사실로 확인. 박근혜씨 이제 어떻게 할겁니까’ 등의 글귀가 적혔다.
셋째날에는 ‘담배세, 주민세, 자동차세 인상. 연말정산 폭탄!’이란 문구와 박 대통령의 후보시절 현수막에 써있던 중증질환 100% 국가책임, 모든 어르신에게 기초노령연금 두배 인상, 반값 등록금 완전실천, 고교 무상의무교육 시대 등 복지 공약이 나열됐다.
사실 전단이 처음 살포되던 지난해 말과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박 대통령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에서 정책비난으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전단 살포를 바라보는 여당 국회의원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지난달 27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관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윤재옥 의원은 오전 국회에서 열린 대정부 질문에서 “국정 시작 3년차로, 내각을 개편하고 새롭게 하려는 이때 국론을 분열시키려는 세력들에 대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며 정부에 강력 대응을 촉구하기도 했다.
사법당국, 처벌 법규
대응 요령 하달
사법당국도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듯 적극적으로 전단 살포 주동자들을 찾아 나섰다. 당초 전단 살포자들에게 어떤 법을 적용해야할지 고민스런 눈치였지만 최근 경찰청에서는 ‘처벌 법규와 대응 요령’ 문건을 일반 경찰서에 하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건에는 VIP(대통령을 지칭)나 정부를 비난·희화하는 전단지 살포 행위자 발견 시 경찰의 대응요령과 처벌 법규 등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먼저 전단지 살포 유형을 빌딩 옥상에 올라가 살포하는 경우, 노상에서 무단으로 살포하거나 시민들에게 배포하는 경우, 건물·노상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낙서하는 경우(그래피티) 등 세 가지로 분류했다.
문건에 따르면 건물 옥상 등에 올라가 무단 살포한 경우와 건물 등에 비방성 낙서를 한 경우에는 각각 건조물 침입 및 재물손괴 혐의로 현행범 체포가 가능하다며 전단지 살포 행위 자체가 경범죄처벌법 ‘광고물 등 무단배포’ 행위에 해당돼 처벌이 가능하다고 적혔다.
이밖에 노상에서 전단을 살포·배포하는 경우를 두고는 “전단지 내용 검토를 해야 ‘명예훼손 또는 모욕 혐의’ 적용 가능 여부 판단할 수 있으므로 일단 검문검색을 위한 임의동행 요구하라”고 설명했다.
이어 “임의동행 불응하고 인적사항도 밝히지 않을 때는 경범죄처벌법(광고물 등 무단배포ㆍ벌금5만원) 위반 혐의로 현행범 체포 가능하다”면서 “전단지나 낙서 내용이 명예훼손이나 모욕 혐의가 명백한 경우에도 현행범 체포 가능”이라고 쓰여 있다.
이 문건은 2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전단지를 살포한 이후 하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경찰은 청와대나 여당의 불쾌한 분위기를 알고도 마땅한 처벌조항을 찾지 못해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대북전단·불법 감청
풍자 위해 등장
한편 최첨단 시대인 지금 구시대의 의사전달 수단인 전단이 등장한 것에 대해서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탈북자들의 대북 삐라 살포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를 원인으로 삼는 경우다.
정부가 대북 삐라에 대해 ‘표현의 자유’라는 이유로 방치한 데 따른 대응 수단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삐라를 살포해도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는 심리다. 실제 경찰도 아직까지 ‘표현의 자유’를 문제 삼지는 못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카카오톡, 밴드, 휴대폰 등 SNS에 대한 정부의 감청 행위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정부의 무차별적인 감청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건 구시대 유물인 삐라 밖에 없다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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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