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 주도”에 청와대 긴장…‘사드’ 공개토론 등 갈등
이병기의 반격 시나리오, 이완구도 존재감 과시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집권 3년차에 돌입한 박근혜 정부에 모처럼 활기가 넘쳐난다. 여권의 세 축인 청와대, 행정부, 집권여당에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면서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대권주자들의 ‘책사’ 출신인 이병기 비서실장은 직전 김기춘 실장 때와 달리 정치권과의 소통에 적극 나섰다. 정치인 출신인 이완구 국무총리는 직전 정홍원 총리와 달리 행정부와 정치권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새누리당 ‘K-Y(김무성 대표-유승민 원내대표) 라인’은 과거 당 지도부와는 달리 청와대와 정부를 향해 할 말은 하는 모습이다.
여권 진용 개편 이후 처음 열린 6일의 고위 당·정·청 정책조정회의는 박근혜 정부 국정운영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현 정부 들어 세 차례 있었던 고위 당·정·청회의에선 회의 일정과 주요 발언 내용이 모두 함구에 부쳐졌다. 하지만 6일 회의에선 모두 공개했다. 서로 할 말은 하는 분위기였다. 여권 세 축이 서로 소통하고 국민에게도 그런 모습을 알리려는 노력이 묻어났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모습은 당·정·청이 여권의 주도권 다툼에 돌입하는 전초전이기도 했다. 실제로 신경전도 벌어졌다. 이병기 실장이 “당·정·청은 한 몸”이라며 조화를 강조하자 유승민 원내대표는 “대통령에게도 안 되는 건 안된다고 보고해야 한다”고 쏘아붙였다. 이완구 총리가 “국회에 계류중인 경제활성화법 처리를 도와달라”고 하자 김무성 대표는 “무조건 정부 편을 들지는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무조건 정부 편을 들지는 않는다”
새누리당 대표를 지낸 황우여 사회부총리는 당·정·청 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옛날엔 이런 분위기 아니었는데, 많이 바뀌었네”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동안 국정운영의 지렛대로 청와대 참모진을 주로 활용했다. 초대 허태열 비서실장이 청와대 내부는 물론이고, 행정부와 여당을 장악하지 못하자 4개월 만에 전격 하차시켰던 것도 박 대통령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란 후문이다. 후임 김기춘 실장은 아예 ‘여당 무시 전략’을 구사했다.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의 전화조차 잘 받지 않았다.
김기춘 실장 시절의 대부분은 여당의 경우 ‘관리형’인 황우여 현 사회부총리가 이끌었다. 황우여 대표 체제의 새누리당은 ‘청와대 2중대’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정도로 ‘약체’였다. 하지만 지금의 ‘K-Y 라인’은 다르다. 결코 청와대에 기죽지 않을 ‘강성’이다.
김무성 대표 홀로 친박계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간혹 주눅이 들기도 했다. ‘개헌봇물론’을 제기한 상하이 발언을 했다가 청와대와 친박계에게서 집중포화를 당하는 바람에 자세를 낮췄던 일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지난 2월 원내대표 경선을 통해 유승민 의원이 원내사령탑에 오르면서 K-Y라인이 구축된 이후엔 거칠 게 없다.
두 사람은 손발도 척척 맞고 있다. 여권 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고(高)고도미사일 방어체제 ‘사드’의 한반도 배치 문제를 놓고 찰떡궁합을 선보이기도 했다. 국회 국방위원장 등을 지내며 방위력 강화를 자주 주장해 온 유 원내대표는 사드 배치에 찬성하면서 4월 중 의원총회를 열어 당론을 모아 보겠다고 했다.
그러자 청와대와 친박계가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 김경재 홍보특보와 친박계 핵심인 이정현·윤상현·김재원 의원 등은 “당 차원의 공개토론은 적절치 않다”며 “신중하지 못한 처사”라고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K-Y라인 공동보조 눈길
이에 유 원내대표는 “의총을 열어도 당론으로 정하지는 않겠다. 이미 수년째 다 공론화가 된사드 문제를 공론화하면 안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친박계로부터 협공을 당해 난감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이 때 김 대표가 지원군으로 나섰다. 김 대표는 “의총이 사드 도입 결정권은 없다. 다만 전문적인 분야이다 보니 의원들이 내용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브레인스토밍’을 하자는 것”이라고 교통정리를 했다.
김 대표와 유 원내대표의 공동보조는 이외에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박근혜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경제정책, 이른바 ‘초이노믹스’에 대해서도 한 목소리로 문제점을 질타한다. 초이노믹스의 핵심은 증세 없는 복지와 더불어 재정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을 기조로 한다. K-Y 라인은 “증세 없는 복지는 거짓”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특히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경제학 박사 출신인 유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의 핵심 추진과제인 ‘규제 개혁’에도 쓴 소리를 서슴치 않았다. 그는 “단순히 규제를 완화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지금 하는 그런 수준의 정책으론 (경제성장의)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장으로 있던 이병기 비서실장을 무리하게 차출한 건 이 같은 K-Y 라인의 ‘도발’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읽힌다. 이 실장은 K-Y 라인과 인연이 깊다. 과거 한나라당 시절부터 한솥밥을 먹었다. 세 사람은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 캠프, 2007년 박근혜 대선후보 경선 캠프에서 손발을 맞췄다.
‘이완구 국무총리’ 카드 역시 K-Y 라인의 여권 장악을 막기 위한 선택으로 파악된다. 이 총리는 세종시 수정 파동 때 박 대통령의 ‘원안 고수’ 입장에 동조하며 충남도지사 자리를 던질 만큼 과단성이 있다. 이 총리 역시 친박계 3선 국회의원으로, 원내대표를 지냈기 때문에 소통 능력이 뛰어나다.
결국 박 대통령은 L-L(이병기-이완구) 라인에게 K-Y 라인의 대항마 역할을 맡긴 결과를 낳았다.
이 실장은 일단 유화적인 자세로 K-Y 라인에 다가서고 있다. 여당 지도부에 한껏 예우를 갖추는 모양새다. 박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나갈 때 두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환송을 하자고 제안한 인물도 이 실장이다.
정치가 체질화 돼 있어서…
그는 정치를 잘 안다. 대선후보 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기 전 안기부(현 국정원) 생활을 할 때부터 정치가 몸에 배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6·29 선언을 입안하는 과정에도 간여했다고 한다. 과거 안기부 소속으로 이른바 ‘정치공작’에도 개입했을 수 있다.
정치가 체질화돼 있기 때문에 K-Y 라인의 대통령에 대한 공격이 과하다 싶을 정도가 되면 이 실장도 즉각 반격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보호하는 일이 사실상의 핵심 업무인 까닭이다.
이완구 총리도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 총리는 지난 12일 대국민 담화를 내고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방위산업 비리와 자원외교 같은 이명박 정부 시절의 중점 추진 사업들이 핵심 대상이다. K-Y 라인이 주도하는 정치권에서 두 사안에 대한 국정조사가 추진되고 있는 시점에 정부도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셈이다.
L-L 라인과 K-Y 라인의 여권 헤게모니 다툼은 새누리당 내 친박-비박계의 갈등과 맞물려 있다. 김 대표는 그동안 개헌 논의, 원외 당협위원장 교체, 여의도연구원장 인선 문제 등을 놓고 수차례 친박계와 충돌했다. 유 원내대표가 가세한 이후 곳곳에서 지뢰밭이 더 만들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K-Y 라인과 친박계의 충돌음은 내년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더 크게 들릴 수밖에 없다. 4월말까지가 시한인 공무원연금개혁 같은 박근혜 정부의 개혁과제를 놓고 전초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높다. 여기서 밀리면 박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은 현실화 된다. 청와대와 내각의 힘도 빠진다. K-Y 라인과 친박계의 전쟁에 L-L 라인이 참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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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성 언론인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