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갯마을’
‘만인의 여인’ ‘청순가련형’여인에서 CE0까지
[일요서울 | 박찬호 기자] 모두가 사랑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60,70년대 척박했던 문화적 토양 속에서 대중과 함께해온 한국의 중견 영화배우들이 깊이 있는 배우론 하나 없이 잊혀져가고 있다. 우리문화와 영화계의 밑거름이 되었던 중견배우. ‘정숙미와 관능미’ 라는 묘한 이미지로 한국 영화사에 강한 발자취를 남긴 여배우 고은아(69) 서울극장 대표를 만났다.
장 콕토는 ‘영화란 영상으로 쓰는 문장’이라고 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영화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면서 시적(詩的) 구조론을 주창했다. 그렇다면, 배우란 무엇일까. 문득 생각해본다. ‘문장’이요 ‘시구’가 아닐까. 추억의 영화를 얘기할 때 ‘맞아, 그 배우’하면서 대부분 주인공 배우를 먼저 떠올린다.
한 여인이 있다. 배우가 된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했다. 청초한 여대생이었을 때, 미술대에서 공예가를 꿈꿨다. 어느 날 한 조각가의 화실에서 친구들을 위해 우연히 모델을 했다. 며칠 후 낯선 사람들이 학교에 찾아왔다. 영화 한편 찍자고 했다. 거절했다. 막무가내였다. 결국 영화사 사무실까지 끌려갔다. 사진 한 컷 만 찍으면 된단다. 얼떨결에 응했다. 이후 인생의 방향이 확 달라졌다. 여대생 본명 ‘이경희’에서 영화배우 예명 ‘고은아’로 바뀌었다.
대표작 문예영화 ‘갯마을’로 잘 알려진 왕년의 스타 고은아 서울극장대표. 추억의 팬들에게는 고 육영수 여사와 닮은 ‘정숙한 여인’으로 인상 깊다. 또 ‘관능미의 여인’‘과부’ 역을 자주 맡았다. 홍익대 1학년 때, 1965년 1월 ‘난의 비가’로 데뷔했으니 올해로 꼭 50년째가 되는 셈이다. 은막을 떠난 지는 40여년 됐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 발전을 위해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
주변에서 고은아 대표를 얘기할 때 극장업계의 ‘성공한 CEO’로 꼽는다. 지난 1997년부터 서울극장과 합동영화사 대표를 맡고 있다. 특히 서울극장은 11개의 개봉관을 갖춘 대형 멀티플렉스 상영관이다. 객석 수 만 해도 3천여석일 만큼 서울 4대문 안에서는 가장 큰 극장으로 변모했다.
지난 주 서울 종로3가에 위치한 서울극장을 찾았다. 고은아 대표의 집무실은 서울극장 7층에 자리해 있었다. 창 너머 서울 시내가 환히 보였다. 이에 고은아 대표는 “서울은 많이 복잡한 것 같아요.”라고 특유의 정숙한 웃음을 짓는다.
창가에 붙은 포스터 하나가 보였다. 제목은 ‘행복한 나눔’이었다. 고은아 대표는 “원래는 ‘생명의 창고’였어요. 쉽게 설명하면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 등 세계 각국의 기아를 위한 봉사단체인데 2003년부터 한국기아대책기구가 설립한 사회적 기업 대표다. 제가 대표가 하다가 대표직을 배우 박미선에게 몇 년 전에 넘기고 저는 이사장직으로 있어요”라고 했다. 재단법인 ‘행복한 나눔’은 한국에서는 실제 가게를 운영하면서 쓰지 않는 물건을 기증받아 팔아 그 수익으로 이웃을 돕는다. 구체적으로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고은아 대표는 얼굴 내미는 것을 싫어하지만 CBS에서 15년 동안(기아관련방송)MC를 맡은 경력도 있고 또 주위의 간곡한 요청으로 ‘행복한 나눔’을 이끌게 됐다고 설명했다. .
극장 운영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고은아 대표는 “직원이 100여명에 이를 만큼 단일극장으로는 규모가 꽤 커졌어요. 어떻게 하면 관람객들이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을까 늘 고민해요.”면서 하루에도 수십 차례 극장 주변을 돌면서 관객들과 만난다고 했다. 원래 서울극장은 돌아가신 곽정환 회장이 지난 78년 세기극장을 인수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고은아 대표는 “과거의 영화는 하루에 몇 커트를 찍었느냐 하는 열정을 자랑삼아 얘기했지만 지금은 영화산업의 규모 자체가 엄청나게 변 했어요”면서 구멍가게 같은 사고에서 벗어나 첨단 과학으로 승부할 때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아울러 97년 극장경영을 본격적으로 맡으면서 컴퓨터와 위기관리 등에 관한 책을 읽고 또 관련 강의도 자주 듣는다고 했다. 온갖 정보 속에서 세상 전체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또한 영화 자체가 현실을 반영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본인 자신도 지금의 세상이 봄바람인지 겨울바람인지 직접 쐬어 보려고 많이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요즘 영화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개봉영화를 대부분 보려 하지만 바쁜 일정 때문에 중간 중간 토막을 내서 보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또 “저는 배우로 살려고 하지도 않았고 한 때 배우로 분에 넘치는 인기도 얻었어요.”고 부연했다.
고은아 대표 역시“사실 영화에 뿌리 내리는 작업을 못했어요. 살아오는 동안 문화적 충돌로 번민도 많이 했어요.”면서 “79년 영화계를 떠난 뒤 신앙에 빠져 살면서 하나님이 왜 영화를 시켰을까. 하는 질문을 자주 던졌어요.”고 했다.
“처음 데뷔작은 정진우 감독의 ‘난의 비가’였지요. 청순가련형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자 역할이었어요. 당시 영화를 찍으면서도 ‘이번 딱 한번이다.’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물론 오영수 작가의 단편소설을 영화로 한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이지요. ‘갯마을’은 남성 중심의 인습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숙명과 인간의 귀소본능 질퍽한 향토색과 농염한 여인들의 살 냄새로 표현해낸 문예영화 입니다”
고은아 대표는 영화출연을 거절하기 위해 영화사에 갔다가 후라이보이 곽규석씨가 권하는 바람에 영화에 인연이 됐다고 술회했다. 나중에 곽규석씨와는 CBS에서 10년 동안 방송을 함께 했다. ‘고은아’라는 이름은 극작가 한운사 선생이 ‘정말 고운 아이’라는 뜻에서 붙여줬다. 고은아 대표는 영화보다 주로 TV드라마에 출연했다. 마지막으로 ‘제2공화국’에서 육영수 여사 역할에 이르기까지 출연작이 영화까지 포함 200여 편에 이른다.
“극장운영을 하면서 인생이란 운전자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좌회전도 해야 하고 우회전도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또 고갯마루 올라갈 때에는 다리가 안 부러 지지만 내리막에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고은아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일기형식으로 메모하는 습관을 가졌단다. 이는 곧 인생을 살아가면서 귀중한 자료가 됐다. 고은아 대표는 영화배우로 한창 인기를 끌던 20대에 지금은 돌아가신 곽 회장과 결혼했다.
고은아 대표는 사는 동안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고, 수첩에서 정리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고 말했다. 건강관리를 위해서는 과식하지 않고 일주일에 한번 꼴로 골프 라운딩을 하며 틈틈이 헬스를 이용한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한 때는 ‘만인의 연인’ ‘청순가련형’ 아직까지 여배우를 향한 상찬으로 유효한 이런 말을 예명처럼 달고 다니던 여배우가 있었다. 그 당시 단아한 자태와 조우하기 위해서는 시계태엽을 한참이나 뒤로 감아야 한다. 그러니까 윤정희, 남정임, 문희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들이 스크린을 온통 수놓았던 6,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트로이카’라는 단어는 세 배우를 기억 속에서 잠깨 우도록 빗장을 열어 주겠지만, 여기 그들 옆에 섰던 또 다른 배우는 아직 ‘현역 영화인, 고은아’로 지금은 서울극장 대표로 우리 마음속에 각인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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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기자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