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부장, ‘허공에 뜬 1000억 행방’ 입 다문 진짜 이유
박 부장, ‘허공에 뜬 1000억 행방’ 입 다문 진짜 이유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9-10-13 11:11
  • 승인 2009.10.13 11:11
  • 호수 807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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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억! 동아건설 횡령사건 기막힌 내막
추석연휴 첫날인 지난 2일 저녁 7시경 데이트코스로 유명한 경기도 미사리 인근 한식당. 형사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타이트한 사이클복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은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순식간에 형사들이 남자를 에워싸자 곁에 있던 중년 부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동아건설 박상두 부장 맞으시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지만 남자는 태연했다. 지갑서 다른 사람의 운전면허증을 꺼내 흔들며 엉뚱한 사람 잡는다고 역정을 내는 남자. 그러나 끝까지 형사들을 속일 수는 없었다.

희대의 횡령범 박상두(48·전(前)동아건설 자금담당부장), 파산 지경에 이른 회사의 법정회생자금을 횡령한 뒤 잠적했던 ‘동아건설 박 부장’이 마침내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3억원의 현상금을 목에 매단 채 도피행각을 벌인지 87일 만이다.

서울 광진경찰서는 박씨와 그를 도와 범행에 가담한 하나은행 직원 김모(50)씨, 박씨의 부인 송모(46)씨 등 3명을 구속했다고 지난 7일 밝혔다. 경찰조사 결과 박씨가 실제로 횡령한 회사 돈은 무려 1898억 원. 당초 알려졌던 900억 원의 2배에 달하는 거액이 박씨의 쌈짓돈이 된 셈이다.

2000여억 원을 들고 튄 동아건설 박 부장. 그의 기막힌 범죄수법과 도피여정, 남은 의혹들을 샅샅이 파헤쳤다.

현재 박씨가 횡령한 돈 가운데 사용처가 밝혀진 것은 절반가량인 940억원뿐이다. 박씨의 경찰진술에 따르면 그는 주식투자 실패로 150억 원을 날린 것을 비롯해 사설경마, 카지노에서 각각 200억 원, 350억 원을 탕진했다. 강원랜드 카지노에서도 190억 원을 뿌려댔으며 포커도박에 50억 원을 쓰기도 했다.

그럼 나머지 1000억 원은 어디로 간 걸까. 박씨는 “앞서 횡령한 금액을 돌려 막느라 남은 돈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결국 1000억 원은 공중에 붕 떠 행방이 묘연하다는 얘기다.


박씨, 소액 환전·환치기 전문가

일각에서는 동아건설이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회사가 개입해 자금을 빼돌린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동아건설, 혹은 대주주인 프라임그룹이 박씨를 이용해 막대한 회생자금을 따로 챙겼을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경찰 관계자는 “박씨가 강원랜드에서 거액을 환전하는 과정에서 돈세탁을 한 정황이 포착됐다”며 “국세청과 합동으로 관련 수표 6000여장의 자료를 확보해 자금흐름을 면밀히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원랜드에서는 2000만 원 이하의 돈을 칩으로 바꾸거나 남은 칩을 다시 현금으로 바꿀 때 교환자의 신분을 확인하지 않는다. 올해만 수십 차례 강원랜드 VVIP룸을 드나든 박씨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는 게 수사팀의 판단이다. 즉 박씨가 돈을 2000만 원 단위로 쪼개 환전하는 수법으로 돈세탁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2억 원 이상을 칩으로 교환해야 입장할 수 있는 VVIP룸에 드나들었음에도 박씨가 환전을 한 기록은 전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앞선 가설에 신빙성을 높여준다.


‘왜 한국 뜨지 않았나’ 의문

박씨의 행적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해외로 나가지 않고 끝까지 국내에서 버텼다는 점이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위조여권 제작과 도피자금을 포함해 10억 원 정도면 중국 또는 동남아로 출국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며 “은신처에 현금으로만 7억 원을 쌓아놓은 박씨가 왜 (한국을) 뜨지 않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현상금 3억원을 내 건 동료들의 현상수배가 마음에 걸렸던 걸까. 하지만 이 때문은 아닌 듯 보인다. 동아건설 임직원이 휴가비를 갹출해 3억원의 현상금을 조성, 박씨를 수소문한 시점은 지난 7월 18일. 그는 이미 열흘 전 휴가계를 내고 잠적한 상태였다. 마음만 먹으면 수사망이 좁아지기 전 해외로 도피할 여유가 충분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박씨는 출국이 아니라 은신을 택했다. 그는 2006년부터 내연 관계를 맺어온 같은 부서 경리직원 권 여인과 지난 석 달 동안 은밀히 동거해왔다. 두 사람의 은신처가 된 서울 상일동 고급빌라(약 78평)는 박씨가 권 여인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는 20대의 대포폰을 이용해 교묘히 지인들과 연락하며 지난달 중순 서울 방이동으로 거처를 옮겨 칩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빌라 붙박이장에 도피자금으로 현금 7억원을 쌓아두기도 했다.

박씨의 본처인 송씨는 권 여인이 범인 은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뒤에야 남편의 외도사실을 알았다는 후문이다.

한편 박씨의 대담무쌍한 범행 뒤에는 고교동문의 든든한 ‘후방지원’이 있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드러났다. 박씨는 동아건설의 하자보수보증금 명목으로 하나은행에 예치된 477억 원을 해당은행 차장이자 고교선배인 김씨를 통해 쌈짓돈처럼 빼 썼다.

법인 인감을 빼돌려 회사문서를 위조해 수백 억 원을 챙기는 데는 역시 고교동문이자 직속 부하직원인 자금과장 유씨가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모두 서울 D상고를 졸업한 인연으로 박씨의 든든한 지원군 노릇을 했다.


# 동아건설 박 부장, 그는 누구?

2000억 원에 달하는 공금을 빼돌리고 무려 석 달 동안 종적을 감췄던 박씨. 그는 평소 성실하고 똑 부러지는 업무처리, 깔끔한 매너로 동료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명문으로 꼽히던 서울 D상고 출신의 박씨는 졸업 직후인 1978년 고졸 신입으로 동아건설에 입사했다.

경리, 회계 관련 부서를 돌며 회사 자금 상황을 훤히 들여다본 그는 동아건설이 파산 선고를 받은 이후인 2005년 자금부에 발령 받았다. 박씨의 고교 후배인 유씨는 이보다 앞선 2004년 자금부에 합류한 상태였고 이후 두 사람은 부서 내 단짝이 됐다. 30년 경력의 박씨와 직속 후배 유씨는 동아건설의 회생채권 업무를 독식하며 엄청난 회계 부정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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