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보좌진의 세계-28] 제보와 정보수집 (上편)
[국회 보좌진의 세계-28] 제보와 정보수집 (上편)
  • 홍준철 기자
  • 입력 2015-03-09 10:22
  • 승인 2015.03.09 10:22
  • 호수 1088
  • 4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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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한보그룹 금융특혜는 제보받아 시작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일이다. 1996년에 국정감사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임기 5대 국회 가 막 시작해 몇 달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국회 보좌진들은 국정감사에 소위 한건을 하려고 열의에 불타 있었다. 무더위가 시작돼 비좁은 舊의원회관에서 연신 부채를 흔들어가며 일할 때였다.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자료를 분석하던 차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지인이던 은행감독원 중간 간부였다. 당시에 은행감독원은 한국은행 소속이었다. 지금의 금융감독원에 해당한다.

느닷없이 당시 정태수 회장이 이끌던 한보그룹이 좀 이상하다고 제보해준 것이다. 그러면서 당시 한보그룹의 주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의 한보그룹 여신 및 담보현황, 유원건설 인수대금 출처 등 자료를 요청해 보라는 것이었다. 은행감독원에서는 한보그룹에 대한 천문학적인 금융지원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정상적인 지원이 아닌 듯하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당시 은행감독원은 은행권을 감독하고 30대 재벌계열사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여신관리를 하던 시절이었다. 은행감독원 직원의 제보는 매우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제보자는 당시 재무구조가 취약한 한보그룹에 막대한 여신지원은 금융특혜 같다고 언급했다. 그리고는 은행권의 심각한 부실을 우려했다. 은행부실은 결국 금융시장 위축으로 이어져 전체 기업에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연쇄 기업도산을 걱정했다. 한보그룹 금융특혜 사건은 아마도 1년뒤 불어닥친 외환위기 유동성 위기의 단초였기도 하다. 필자도 당시 금융권에서 나도는 소문을 듣고 이상 징후들을 약간 파악 했을 때였다. 그러던 차에 은행감독원 직원의 제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뭔가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곧바로 자료목록을 작성해 기획재정부와 은행감독원에 공문으로 요청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일은행과 한보그룹을 발칵 뒤집어 놓은 듯했다. 최초로 국회에서 한보그룹 금융특혜 사실을 인지하고 칼끝을 겨눈 것이다. 이후 예상치 못한 사태들이 나타났다. 느닷없이 당시 제일은행 여신담당 임원이 찾아왔다.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긴장감도 역력했다. 자료요청을 한 배경부터 궁금해했다. 의도가 뭐냐고 캐물었다. 핵심을 찌른 게 분명했다. 송곳에 찔린 듯 아픈 것 같았다. 자료제출이 곤란하다고 했다. 개별기업의 여신현황은 기업비밀 운운하며 변명을 늘어 놓았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필자가 아니었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냐고 따졌다. 자료제출을 거부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윽박도 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 임원은 발길을 되돌렸다. 이후 기획재정부와 은행감독원 측에 수차례 자료제출 독촉을 가했다. 그런 끝에 비록 아주 제한적이지만 한보그룹의 여신총괄 현황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짐작한 대로였다. 불과 1∼2년 사이에 수천억 원의 여신이 지원된 사실이 드러났다. 물론 담보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한보그룹에 대한 금융특혜 사실이 일부 드러난 것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한보사태’의 꼬리가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한보사건은 그렇게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보사건 본격적으로 캐기 시작…

이후에 한보그룹 금융특혜 사건을 본격적으로 파기 시작했다. 국회에서 문제제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보철강의 충남 당진군에 건설하던 제철소의 건설자금 지원경위부터 파악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거래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이 막대한 여신지원을 배경과 사유를 집요하게 캤다. 마치 금맥을 찾아 어두운 갱도를 파들어가는 심정이었다. 자료수집이 만만치 않았다. 제보를 바탕으로 금융인사들에게도 탑문하기 시작했다. 언론사 기자들도 접촉했다. 그렇게 조금씩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역시 배후가 있었다. 짐작한 대로 권력형 비리사건이었다. 재무구조 취약하고 덩치에 걸맞지 않은 투자였다.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로비로 진행된 막대한 금융특혜였던 것이다.

현재는 은행,증권,보험 등 금융권 전체를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이 감독하고 있으나 당시는 금융권별로 각각 분리돼 있었다. 그 시절에는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등으로 나눠져 있었다. 당시 금융권에는 이상징후가 포착되기 시작했다. 당시 정태수 회장이 이끌던 한보그룹에 주거래은행에서 돈을 쏟아붓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재무구조가 취약하던 한보그룹에 막대한 은행여신이 지원되는 등 금융특혜가 베풀어지고 있다는 정보들이 증권가와 금융권에서도 유포되기 시작했다. 한보그룹의 계열사 한보철강이 충남 당진에 대규모 철강단지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주거래은행을 비롯한 은행권이 여신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룹의 덩치에 비해 지나친 대규모 투자사업이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무모한 투자였다.

은행임원, 자살소식에 충격받아

당시 언론에서도 한보그룹의 금융특혜와 정태수 일가에 대한 비리관련 기사들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결국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한보그룹 금융특혜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관련자들을 상대로 줄줄히 검찰조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주거래은행 여신담당 임원은 급기야 자살을 택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수가 없었지만 그 임원은 무척이나 괴로워했던 것 같다. 안타깝게 스스로 목을 맨 것이다. 그 임원이 찾아왔던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여신담당 임원이 혼자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은 아니었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한보그룹 금융특혜 뒤에는 권력인사들이 숨어 있었다.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 일가의 온갖 비리가 함께 권력형 비리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의원회관을 찾아왔던 인사의 갑작스러운 자살소식은 지금도 뇌리에서 잊어지지 않는다. 한보그룹 금융특혜를 파헤치려던 열정이 솔직히 잠시 위축되었다. 아마도 죽음 앞에 괴로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기도 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죽음을 택한 그 임원의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할 정도다. 주거래은행의 여신담당 임원으로서 무척이나 괴로워했던 것 같다. 한보그룹의 금융특혜를 막지 못하고, 권력주변 인사들의 금융지원 압력을 이겨내지 못한 죄책감과 무력감 등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매우 안타까운 죽음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검찰조사와 국정조사 등을 통해 드러난 사실이지만 청와대 비서진 등 권력형 비리사건이었다. 심지어 청와대 총무비서관마저도 깃털 논란이 제기되었다. 그 윗선이 개입되지 않고는 천문학적인 금융특혜가 이뤄질 수 없다고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사건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청와대 비서진 등 권력의 핵심층 등 한보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이 줄줄이 도마위에 오르고 수사선상에 올랐다. 마치 고구마줄기를 캐는 것 같았다.  <김현목 보좌관>
 

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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