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기자의 대한민국 수사반장 16탄 ‘신중한 포수’ 김희남 경위
이수영 기자의 대한민국 수사반장 16탄 ‘신중한 포수’ 김희남 경위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9-10-13 10:39
  • 승인 2009.10.13 10:39
  • 호수 807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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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암달러상 살인사건, 진범 잡았었다”
84년 명동성당 암달러상 피살사건을 다룬 당시 신문기사

“아직까지 미제로 남아 있는 ‘명동 암달러상 살인사건’ 말입니다. 사실 유력한 용의자가 경찰에 검거됐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을 끝까지 풀지 못한 복잡한 사연이 있지요.”

시퍼런 서슬의 유신정권시절, 서울 명동성당은 없는 자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대한민국 수도에서도 성지나 다름없는 그곳이 피칠갑 된 네 구의 시신으로 채워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1984년 일명 ‘명동 암달러상 피살사건’으로 알려진 살인극은 현재까지 진범이 잡히지 않아 희대의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사건이 발생한 지 25년. 사건을 담당했던 김희남 경위(당시 서울 중부경찰서 강력계 형사)는 뒤늦게 살인사건의 진실을 기자에게 토로했다. “경찰이 수개월 동안 잡지 못한 범인의 소재가 어떻게 제 귀에 들어왔는지, 녀석을 붙잡은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야 속 시원히 털어놓겠군요.” 젊은 혈기로 현장을 뛰던 민완형사는 희끗희끗한 백발의 중년으로 변모했다. 잊혀진 살인극의 비밀이 마침내 베일을 벗기에는 충분한 세월이 흐른 셈이다.


피로 물든 성당, 참혹한 현장

화성 연쇄살인극과 더불어 국내 최악의 미제 강력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명동 암달러상 피살사건’은 현장의 참혹함 만으로 국내 일간지 톱을 장식할 만큼 엽기적이었다.

1984년 7월 16일 오후 2시 15분. 서울 명동성당 문화관 1층 천주교서울관구법원 안에서 20대 처녀부터 70대 노파까지 여인 4명의 피투성이 시신이 발견됐다. 이들은 명동 중국대사관 인근을 무대로 활동하던 암달러상 이모(당시 71세)노파와 노모(당시 66세)여인, 이 노파의 친척 김모(당시 27세)양, 성당 청소담당 기모(당시 49세)여인 등이었다.

희생자 모두는 두개골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뭉개진 상태였다. 둔탁한 흉기로 뒤통수를 여러 번 얻어맞은 까닭이다. 특히 청소부 기 여인은 최후까지 범인과 격렬한 몸싸움을 한 흔적이 발견됐다.

범인은 암달러상 여인들의 두둑한 현찰을 노린듯했다. 숨진 이 노파와 노 여인이 지니고 있던 미화 3만5000달러와 600만원 상당의 현금이 고스란히 사라진 것. 곧 성당 인근에서 점퍼 차림의 수상한 50대 남성을 목격했다는 진술이 나왔고 사건 현장 인근에서 용의자의 것으로 보이는 남성 점퍼와 옷가지 등 증거물이 쏟아져 나왔다. 대낮에 4명의 여인을 몰살한 살인마의 정체는 금방이라도 드러날 것 같았다.

그러나 신기루처럼 수사팀을 도발하던 진범의 정체는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적어도 언론을 포함한 공식적인 발표 상으로는 말이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암달러상 사건을 영구미제로 기억할 겁니다.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가 있었지요. 녀석을 붙잡아 자백을 받고 자술서까지 확보했습니다. 결국 우리 형사들 실수였지요. 설마 그놈이 경찰서 안에서 손목을 긋고 목 맨 시체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 말입니다.”


“상습 사기꾼이던 용의자, 자해 뒤 자살”

사건 발생 한 달이 넘도록 수사에 진전이 없자 언론은 형사들의 무능을 질타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매일같이 일간지 사회면을 큼지막하게 장식할 만큼 굵직한 사건인 탓에 수사팀의 스트레스도 상당했다. 당시 서울 중부경찰서 강력계 형사로 사건을 담당한 김희남 경위 역시 매일 이어지는 강행군에 인간적인 한계에 부딪친 상황이었다고 토로했다.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습니다. 경찰 윗선은 물론이고 언론사 등쌀에 치어죽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우연한 기회에 결정적인 단서를 잡게 됐습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김희남 형사는 유난히 성당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수개월 간 성당 안에서 동고동락하며 고생하는 김 형사에게 천금같은 제보가 날아든 것은 예정된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단, 기자는 김 경위의 요청에 따라 당시 결정적인 제보를 한 인물과 정보 입수 경위에 대해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제보를 토대로 녀석을 붙잡았습니다. 당초 목격자 진술과 상당히 흡사했지요. 심증을 갖고 말을 붙였는데 곧바로 자백을 하더군요. 당시 현장 상황과 살해 방법, 동기까지 상당히 구체적이었습니다.”

오랜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은 후련함에 김 경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용의자와 함께 경찰서로 복귀한 그는 동료 형사에게 용의자 심문을 맡기고 까무룩 토막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달콤한 휴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찢어지는 듯한 남자의 비명에 번쩍 눈을 뜬 김 경위는 용의자와 동료가 마주 앉아있던 책상이 선혈로 흠뻑 젖어 있는 걸 봤다. 자술서를 쓰던 용의자가 책상 한 쪽에 꽂혀 있던 커터 칼로 순식간에 손목을 긋고 이를 말리는 형사에게 칼을 휘둘러 두 사람 모두 피투성이가 된 것.

더구나 마치 의도한 듯 용의자는 범행 직전의 행적까지만 자술서에 기록한 채였다. 자백을 했더라도 피의자가 자술서를 기록하지 않으면 실제 피의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조사 중이던 피의자가 경찰서 안에서 사고를 당하면 그야말로 ‘경을 칠 일’이지요. 일단 병원으로 녀석을 옮기고 안정시켰는데 아무래도 용의자 상태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당시 용의자 가족들은 그가 과거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정신이상 증세가 있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수사팀은 진위를 가리기 위해 그의 정신감정을 의뢰하기로 했다. 서울 응암동 정신병원에 용의자를 이송한 김 경위는 그날 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병원에 들어간 지 하룻밤도 지나지 않았는데 놈이 거기서 죽었다는 겁니다. 이미 한번 자해를 한 피의자라 특별 감호를 부탁했는데 천정에 늘어진 전기선에 목을 맨 거지요.”


수사에도 운이 필요하다

유력한 용의자가 저 세상 사람이 되자 수사팀의 사기도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 경위는 동료들을 독려해 죽은 용의자의 마지막 행적을 쫓기로 했다. 그가 생전에 남긴 자술서 한 장을 들고 형사들은 두 팀으로 나눠 대구로 출동했다. 그러나 형사들에게는 끝까지 운이 따르지 않았다.

“가을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먼저 대구에 내려가 동료들과 만나기로 한 호텔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는데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연락이 없더군요. 무슨 일이 생긴 줄 아십니까? 뒤따라 내려오던 형사들이 교통사고를 낸 겁니다. 그것도 사람을 치어 죽였단 말입니다.”

명백한 사고였다.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던 2차선 도로에서 70대 노파가 무단횡단을 하다 중부서 형사들이 탄 승합차에 치여 숨진 것. 피해자 과실이 당연히 컸지만 인명사고를 낸 탓에 운전을 한 형사는 대구 중부경찰서에 피의자 신분으로 묶여 있어야 했다. 김 경위는 아찔했던 그때를 회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더 기 막힌 건 돌아가신 할머니가 대구 동부지법 모 판사의 모친이었다는 겁니다. 차마 유가족에게 ‘형사’ 신분을 밝힐 수 없어 대강 둘러댔는데 그 말 한마디에 바로 ‘살려주십사’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사자 합의가 불가능한 인명사고인 탓에 형사들은 한동안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법정공방에 매달려야 했다.

또 명동 암달러상 피살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의 행적 역시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했다. 수사팀을 덮친 연속된 불운에 희대의 살인극은 결국 미제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숱한 사건들을 겪었지만 그때만큼 아쉬운 적이 또 없습니다. 누군가 범인을 못 잡은 경찰을 나무란다면 그때 일화를 꼭 들려주고 싶었는데 이제야 기회를 만난 것 같군요.”


수사는 긴 호흡으로

1969년 서울경찰학교 11기 출신으로 경찰에 투신한 김희남 경위는 34년 4개월 간 수사전문 형사로 활약했다. 서울시경 기동대, 청와대 경비대를 거쳐 1971년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과를 시작으로 강력계에 입문한 그는 2003년 서울지방경찰청 강력1반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했다.

수개월 전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한 차례 고사했던 김 경위는 스스로를 ‘내세울 것 없는 사람’으로 줄곧 낮췄다. 그러나 서울시경 형사과 시절 폭력계와 도범계를 섭렵하며 희대의 범죄꾼을 상대했던 그는 기자가 화두로 던진 사건마다 정확한 내막을 짚어주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김 경위가 특히 강조한 수사원칙은 ‘절대 예단하지 말 것’. 지난 2002년 서울 미아동에서 발생한 70대 노부부 살인사건은 김 경위의 원칙이 제대로 들어맞은 사건이다. 당시 70대 노부부와 90대 장모가 한꺼번에 피살된 사건은 인근 고시원에 거주하는 무직자의 소행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건을 담당한 관할서 형사들은 노부부와 갈등을 빚은 친인척을 의심하며 서둘러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서울지방청 소속으로 수사를 측면 지원한 김 경위는 현장에서 몇 가지 미심쩍은 흔적을 발견하고 자체 수사를 통해 진범을 밝혀냈다. 그의 ‘긴 호흡 수사’가 제대로 빛을 발한 것이었다. “가끔 후배 형사들을 보면 지나치게 속도전에 목을 매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내세울 것 없는 선배지만 이런 점은 꼭 강조하고 싶습니다.”


리얼스토리 talk box

“70년대 초 ‘한국이 독도에 대포 설치했다’ 일본 정부 공식항의 나 때문”

김희남 경위-69년 경찰 새내기로 기동대에 편입된 김 경위는 이후 수년 간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억세게 재수 없는’ 경우였다며 너털웃음을 지은 그는 서울태생임에도 선배들 등쌀에 밀려 경북과 울릉도를 거쳐 독도수비대까지 오가며 경력을 쌓았다. 그는 70년대 초 독도에서 일본 순시선과 대치하던 중 생긴 웃지 못 할 에피소드와 ‘생애 최악의 흉악범’으로 꼽은 80년대 장충동 2인조 강도단 사건의 내막을 공개했다.

- 70년대 독도를 둘러싸고 일본의 도발이 한창 심했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면.
▲ “당시 총각인 죄(?)로 울릉도에서 독도로 발령을 받아 1년 정도 근무했다. 당시 7명이 1개 분대를 이뤄 근무했는데 생활환경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삽으로 돌산을 깎아 분지를 만들고 거기에 움막을 지어 먹고 살았으니 오죽했겠는가. 당시 105mm 탄피를 여러 개 이어 붙여 숙소 굴뚝으로 썼는데 바람이 심하다보니 이게 하루에도 몇 번씩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일본 순시선이 독도 코앞까지 진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개인 화기라고는 ‘칼빈 소총’뿐이었던 지라 잔뜩 긴장했었다. 나도 모르게 고꾸라진 굴뚝을 휘휘 흔들며 ‘저리 가, 저리 가’를 중얼거렸는데 얼마 뒤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에 공식 항의 서한을 보내는 소동이 벌어졌다. 뭐 한국 정부가 독도에 대포를 설치했다나. 내가 위협삼아 흔들었던 탄피 굴뚝을 대포로 착가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는 상당히 큰 이슈였다.”

- 검거한 범죄자 가운데 ‘최악의 흉악범’을 꼽는다면.
▲ “80년대 서울 장충동 2인조 강도단. 지금도 유명한 충무로 A식당 사장 집에 강도가 들어 만삭의 임산부를 윤간하고 금품을 빼앗아간 사건이다. 피해자는 A식당 종업원의 아내였다. 사장이 아파트로 이사하는 동안 종업원이 집에 머물며 관리했는데 강도들이 집을 보러 왔다는 핑계로 침입해 몹쓸 짓을 한 것이다. 그때 범인들에게도 화가 치밀었지만 피해자의 남편에게 더 화가 많이 났다. 산달을 코앞에 둔 피해자는 아기를 지키기 위해 강도들의 만행에도 꾹 참고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 남편이라는 인간은 담당 형사인 날 찾아와 ‘아이를 낳는 대로 저 여자와 이혼하겠다’며 큰소리치는 게 아닌가. 아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며 설득했는데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경찰서 안에서 욕을 해가며 남편을 족쳤다. 그런 덕분일까. 부부는 헤어지지 않았고 그 아이는 지금 대학생이 됐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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