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과 국정원 新밀월 시대
박근혜 정권과 국정원 新밀월 시대
  • 홍준철 기자
  • 입력 2015-03-09 10:10
  • 승인 2015.03.09 10:10
  • 호수 1088
  • 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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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ㅣ홍준철 기자]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메가톤급 핫이슈의 중심에 있는 조직이 있다. 바로 국정원이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권시절 ‘음지’에서 지내온 조직이었지만 이명박 정권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면서 현재까지 박근혜 정권과 한몸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는 이병기 전 국정원장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면서 사실상 ‘국정원’ 조직의 위상이 함께 높아졌다. 한때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말은 ‘권력을 지향한다’는 말로 대체해도 무방할 정도다. 박 정권과 국정원의 신(新) 밀월 관계를 조명해 봤다.

- 원세훈, 남재준, 이병기 음지에서 ‘쥐락펴락’
- 이병기 실장, 노태우-김영삼-朴 정권 ‘승승장구’


최근 서울고등법원은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의혹과 관련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법정 구속시켰다. 물론 대법원 최종 판결이 남아있지만 2심 재판부는 공직선거법 위반한 혐의에 대해 ‘무죄’를 내렸던 1심 선고와는 반대로 원 전 원장에 대해 자격정지 3년에 징역 3년이라는 중형을 내렸다.

원세훈 ‘유죄’ 박근혜 정권 탄생 1등공신?

▲ 원세훈 <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2012년 8월 이후 국정원 심리전단이 인터넷 및 트위터 등에 댓글을 단 행위가 선거에 개입한 것으로 인정한 셈이다. 이는 곧 검찰이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이 박근혜 정권 탄생하는 데 ‘일조했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원 전 원장 개인으로선 구속되는 불운을 겪을지 모르지만 국정원 전체를 봐선 이 정권이 끝나기 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공산이 높아졌다. 그래서일까.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국정원과 박 정권은 불가분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이명박정권 때 임명된 원 전 원장이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이후 박근혜 정권 초대 국정원장은 남재준 전 특보였다. 예비역 참모총장인 남 전 원장은 지난 대선때 새누리당 박근혜 캠프에서 국방안보 분야 특보로 활동했다. 2007년 당내 경선 때에도 국방안보 분야 특보로 정책조언자 역할을 한 측근이다. 육사 출신으로 참모총장에 오르기까지 군 내에서는 ‘참군인’으로 통했고 ‘선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남 전 원장은 임명된 순간부터 국정원 대선 관련 댓글 사건으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자칫하면 박 대통령 당선 관련 정통성 문제까지 제기될 수 있는 뜨거운 현안이었다. 이에 남 전 원장은 당시 여야 정치권의 논란이었던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전격적으로 공개하면서 ‘물타기 전략’을 구사했다.

결국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성 훼손 문제가 불거졌지만 대선개입 의혹 사건은 묻히고 대화록 공개 파문이 뒤를 이었다. 덕분에 박 대통령은 정권 초기 최대 아킬레스건인 대선개입 의혹 사건은 국민적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nll 포기발언’은 사실무근으로 판명났고 오히려 ‘포기발언을 했다’고 문제삼은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은 허위사실 유포로 벌금 1000만 원을 물어야 했다.

이로 인해 남 전 원장은 ‘참담하고 책임을 통감한다’고 2014년 4월15일 대국민 사과를 하는 등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우연찮게도 바로 다음날 대한민국 모든 이슈를 집어삼킬 세월호 침몰 참사가 일어나면서 모든 관심은 진도와 팽목항으로 쏠렸다. 정치권과 국민 모두는 깊은 충격과 슬픔에 잠겼고 ‘전원 구조’라는 초기 보도와는 달리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채’ 깊은 절망을 남겼다.
 
남재준 전 원장 “정권을 위해서라면.…”

▲ 남재준 <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이 당시에도 국정원이 거론됐는데 ‘세월호가 국정원의 관리대상이었다’는 문건이 발표되면서 재차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론이 심상치않게 돌아가자 청와대는 5월 22일 돌연 남재준 원장의 사표수리 사실을 발표해야만 했다. 사실상 경질성 문책이었지만 ‘토사구팽’(兎死狗烹) 이라는 시각도 함께 나왔다.

남 전 원장의 뒤를 이은 후임이 바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이병기 전 국정원장이다. 외교관 출신인 이병기 실장은 해외담당파트인 국정원 2차장 시절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을 주도해 화제가 된 인물이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 옷을 벗은 그가 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국정원 수장으로 돌아오자 ‘화려한 귀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여권 내에서는 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이 실장이 정보기관 생리에 밝고 대통령의 의중을 잘 읽고 있는 몇 안되는 인사로 꾸준하게 국정원장감으로 지목돼 왔다. 서울 출신인 그는 경복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74년 외무고시(8회)에 합격했다. 그가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1년 노신영 당시 외무부 장관의 눈에 들어 노태우 정무장관의 보좌역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이로 인해 노태우 정권 하에서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을 지내면서 대통령과 지근거리에서 지냈다. 이 시절 이 실장은 노 대통령이 박근혜 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해 위로하는 자리에 함께 배석하면서 첫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박 대통령은 이 실장의 세심한 의전과 배려로 인해 강하게 인상에 남았다는 후문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신임을 받은 이 실장은 민정·민주·공화당이 합당해 이룬 민자당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 YS정권하에서는 그는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에 임명됐고 역사적인 황장엽 망명 사건을 주도하게 된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터진 ‘안기부 북풍공작 사건’ 당시 지휘라인에 있었다는 점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빛을 볼 수 없었다. 북풍공작은 1997년 대선에서 안기부가 여당 이회창 후보에 유리한 쪽으로 선거 국면을 몰고 가기 위해 야당측 김대중 후보에 가한 음해에 조직적으로 나선 사건이다. 결국 이 실장은 DJ정부 출범과 함께 2차장직을 내놓고 공직생활도 접고 일본으로 건너가 객원교수로 머물러 있었다.

이병기 비서실장 임명 박 대통령의 언질은 언제?

▲ 이병기 <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그러다 2002년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정치특보로 정계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의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할 당시 구원투수로 나선 박근혜 대통령 곁에 다시 이 실장이 나타났다. 2007년에 대선 당내 경선 당시에는 박근혜 캠프에서 선거대책부위원장을 맡아 외교·안보 분야는 물론 정무 등에 관한 조언을 했다. 역시 2012년 대선 때는 여의도연구소 고문을 맡아 박 대통령 당선에 힘썼고 당선된 이후 주일대사를 거쳐 국정원장에 임명됐다.

국정원장 시절 이 실장은 국가정보기관 대개조라는 숙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국정원 개혁뿐만 아니라 조직개편과 인사 그리고 정치개입 논란을 종식할 제도 마련, 나아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한 대북관계 개선까지 할 일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집권 3년차를 맞아 김기춘 비서실장 후임으로 이병기 전 원장 임명을 강행했다. 국정원장으로 임명된 지 8개월 만에 옷을 벗은 셈이 됐다.

내정 관련해서도 이미 이 실장은 발표 이틀 전부터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언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발표 당일까지 이런 저런 인물이 거론됐지만 이는 모두 이 실장을 보호하기위한 청와대의 전략이었던 셈이다. 이는 곧 박 대통령의 이 실장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국정원 분위기도 한껏 고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권 초기부터 안팎으로 뭇매를 맞아온 국정원이다. 대통령 대면보고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국정원 수장이 대통령 실장으로 옮긴 것은 사실상 국정원으로선 청와대와 핫라인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 정권이 들어서는 데 일조했고 정권이 끝날 때까지 국정원과 박 정권의 밀월은 계속될 전망이다. 

mariocap@ilyoseoul.co.kr

역대 정권과 국정원 부침사
-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변천’

국가정보원은 1961년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군인들이 같은 해 6월 만든 ‘중앙정보부’에서 시작됐다. 80년 12월31일 국가안전기획부로 명칭을 변경했고 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에 이른다.

국가정보원장은 장관급이면 해외.국내.북한을 담당하는 3명의 차장과 기획조정실장은 차관급이다. 국내 주요 도시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해외 한국 대사관에도 국가안보, 산업기밀, 해외정보 수집 등의 업무를 위해 국정원 직원을 파견하고 있다. 해외 정보와 국내 보안정보의 수집과 분석,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문서.시설 등에 대한 보안업무 등이 국정원의 주요 업무다.

하지만  정보 수집과 분석이 주된 업무다보니 정치적으로 악용될 위험도 있어 정치적 중립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민정부 시절 국정원의 ‘정치중립화’를 위해 1994년 국회 정보위원회 개설로 이어졌고 정보독점을 감시하고 있다. DJ정부시절에는 ‘공식적으로 정치개입 중단’을 지시했고 차관급 자리가 절반으로 줄고 200여개의 책상이 사라졌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국정원의 정치개입 차단 의지는 계속됐다. 결국 매주 금요일마다 이뤄지던 국정원장의 대통령 독대 보고도 폐지됐다. 최고 통치권자에 대한 ‘직보’를 바탕으로 권력을 누리던 국정원이었다. 이로인해 국정원의 선거개입이나 정치사찰 논란은 참여정부에서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철>

 

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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