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주 한 순배 돌린 뒤 일갈, “우린 대한민국 형사다!”

유력한(?) 연쇄살인 용의자를 사이에 두고 형사들은 자장면 삼매경에 빠져 있다. 조금 모자란 듯 어리바리한 용의자가 군만두 하나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순간 흑백 TV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흐른다.
‘실화수사극-수사반장’이란 흑백 타이틀, 긴박한 타악기 박자에 맞춰 두 시골형사와 용의자는 움찔움찔 몸을 흔든다. “나는 저 음악이 좋아!” 영화 ‘살인의 추억’ 속 박 형사(송강호 분)의 추임새는 당시 드라마 ‘수사반장’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일선 형사들마저 넋을 잃고 볼 정도니 일반 국민들은 어땠으랴.
된장냄새 나는 구수한 대한민국 형사들의 사건 파일을 집대성한 드라마 ‘수사반장’은 1971년 첫 방영을 시작해 무려 18년 동안 전국의 시청자를 울리고 웃겼다. 당시 ‘박 반장’ 최불암을 필두로 김상순, 조경환, 남성훈, 노경주 등 수사팀 5인방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들의 실제 모델인 형사 개개인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지난달 29일 반가운 전화가 기자의 휴대전화로 걸려왔다. <일요서울>의 기획연재 시리즈 ‘리얼스토리-대한민국 수사반장’의 첫 번째 주인공이었던 최중락 총경(81·현 삼성에스원 고문)이었다. 최 총경은 “소개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며 ‘특별한 모임’에 기자를 초대했다.
이른 저녁 서울 서대문의 한 한정식당을 찾은 기자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20년 전 ‘박 반장’을 비롯해 ‘수사반장’과 함께한 주요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 소박한 밥상에 둘러앉아 탁주 한 순배씩을 돌린 이들은 저마다 지난 회포를 풀기에 여념이 없었다.
리얼스토리 15번째 이야기는 20년 만에 뭉친 ‘수사반장’ 주인공들과의 만남이다.
“저 역시 신참 조연출(AD)시절 수사반장 제작에 참여한 스텝 출신입니다. 그때 수사반장 세트는 다른 곳에 비해 상당히 높았습니다. 저를 비롯한 스텝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 자문역을 맡은 형사님들이 ‘똑바로 못하냐’며 우스개 소리로 호통을 치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수사반장’ AD, 제작본부장으로 금의환향
드라마 ‘인어아가씨’등 히트작을 통해 유명 프로듀서로 알려진 이재갑(54) MBC제작본부장은 왕년의 스타들 사이에서 한참 막내뻘에 속했다. 드라마 세트장에서 말단 직원으로 고생하던 그는 20년 만에 해당 방송사 제작 책임자로 금의환향한 셈이다.
이 본부장의 건배제의에 따라 ‘반장네 가족들’은 일제히 잔을 들어올렸다. 우렁찬 건배 합창과 함께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날 모임은 최중락 총경이 이끄는 ‘반장네 가족들’의 가을 정기모임이었다. 최불암, 김상순, 임현식, 현석, 김용건, 박광남 등 중견배우들과 전·현직 수사관들이 한 자리에 모인 풍경은 흔치않은 장면이다.
‘박 반장’(최불암 분)의 실제 모델인 최 총경이 드라마 ‘수사반장’과 인연을 맺은 이들과 뜻을 모아 조직한 이 모임은 매년 몇 차례 정기모임을 갖고 친목을 다진다. 지난 4월을 끝으로 모임이 없었으니 ‘가족’ 구성원이 제대로 모인 지는 거의 반년 만이다.
“그저 모이면 예전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것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옛 추억에 젖다보면 또 전성기로 돌아가는 것 같고, 젊어지는 기분이 든다니까요.”
중견탤런트이자 영화 ‘추격자’ ‘국가대표’로 최고의 흥행배우가 된 하정우(31)의 부친이기도한 김용건씨는 모임의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했다. MBC ‘전원일기’에서 ‘김 회장 댁 큰아들’로 분했던 그는 최불암씨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수사반장 모임에 몸담은 열혈멤버다. ‘총무’역의 김용건씨는 이날도 인기드라마 ‘태양을 삼켜라’ 지방 촬영이 있었지만 모임 일정에 맞추기 위해 오후 비행기로 날아왔을 정도다.
이날 무엇보다 기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브라운과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뛰어넘은 ‘수사반장 3인방’의 만남이었다. ‘박 반장’을 열연한 ‘국민배우’ 최불암씨와 그의 모델이 된 최중락 총경, 또 현재 경찰청 형사과 소속 임형찬 수사관의 삼자대면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와 현재, 브라운관을 뛰어넘은 ‘수사반장’
브라운관 데뷔 4년 만에 ‘수사반장’으로 대표배우 호칭을 얻은 최불암씨는 그때의 추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모든 작품에 최선을 다하지만 ‘수사반장’ 만큼은 정말 공을 많이 들인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국내 최초의 수사극에 도전한다는 사명감도 있었고 실제 사건을 방불케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드라마가 인기를 끌자 수배 중이던 범인들이 ‘박 반장’인 제게 자수를 하는 놀라운 일도 생겼지요. 배우로서 정말 소중한 경험입니다.”
국민배우는 막내딸 연배와 비슷한 기자에게 손수 술잔을 권했다. 곁에서 현직 경찰인 임 수사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와 마찬가지로 이날 모임에 처음 함께한 임형찬 수사관은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와 광역수사대, 경찰청 형사과 등을 거친 100% 수사통이다. 최중락 총경의 직속 후배인 그는 매일 새벽 경찰청 수사연구관실을 찾아 사건·사고 기록을 훑어보는 최 총경을 보좌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때문에 그 역시 대선배들과의 만남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최 총경님이 새벽마다 본청으로 출근하시는 건 많이들 아시겠지만, 정말 수사에 대한 열정은 어떤 현직 형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대단하신 분입니다. 저도 경찰에 입문해 지금까지 수사에만 매달렸지만 가장 존경하는 선배님이시죠. ‘수사반장’의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도 최 총경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의지 덕분 아니겠습니까.”
서로의 대한 덕담과 반가움이 뒤섞인 가운데 안타까운 분위기도 잠시 흘렀다. 수사반장이 한창 방영 중이던 1978년 뇌출혈로 고인이 된 ‘서 형사’역의 故김호정씨와 지난 2002년 세상을 떠난 ‘남 형사’ 故남성훈씨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핸섬한 엘리트 형사’로 인기를 모았던 남성훈씨에 대한 안타까움에 일부 참석자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드라마페스티벌’에서 다시보고 싶은 명작드라마 1위로 뽑히기도 했던 ‘수사반장’. 과거와 현재, 브라운관과 현실을 뛰어넘어 20년 만에 뭉친 영웅들은 마지막으로 ‘요즘 경찰’을 향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사건에 대해 포기를 모르는 근성과 인간미를 겸비한 형사.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보여준 대한민국 경찰의 모습이었습니다.”
대선배들이 일갈한 ‘대한민국 경찰’. 2009년 그들의 자화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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