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보다 더 잔인한 ‘카피캣’ 경보
원조보다 더 잔인한 ‘카피캣’ 경보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9-09-01 15:14
  • 승인 2009.09.01 15:14
  • 호수 801
  • 4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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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넘어 진화하는 잔혹범죄, 그 밑바닥에는…
사진설명 : ▶연쇄살인범과 모방범죄를 그린 영화 ‘우리동네’의 한 장면

“우리가 누군 줄 알아? 연쇄살인범 강호순 형님 후배들이야. 그분은 우리 우상이시지. 죽고 싶지 않으면 말 잘 들으라고. 알겠어?”

구둣발에 짓밟혀 피딱지가 말라붙은 여인의 얼굴은 극심한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눅눅한 여름 밤, 인적하나 없는 야산 한 복판서 세 명의 괴한들에 둘러싸인 여인은 괴로움에 치를 떨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도 ‘강호순’이라는 이름 석자는 끊임없이 그를 위협했다. ‘강호순의 후배’들은 공포에 질려 완전히 얼어버린 여인을 무자비하게 윤간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순간에도 피해자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올해 초 신문과 인터넷을 도배하다시피 했던 강호순의 살인행각은 마지막 저항의지마저 꺾어버릴 만큼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괴한들은 ‘우상’ 강호순처럼 행동했고 강의 이름을 팔아 손쉽게 피해자를 굴복시켰다. 그러나 폭행과 집단성폭행까지 서슴지 않은 이들의 범행은 오히려 강호순보다 더 잔혹하고 비열했다. 최근 ‘모방’에서 시작된 ‘카피캣’(copycat·모방범죄·모방범죄자)이 ‘원조’를 넘어 진화하고 있다.

올해 초 검거된 강호순(39·사형확정)은 2006년 9월~지난해 12월까지 8명의 부녀자를 유인·납치해 겁탈하고 살해한 인물이다. 일명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사건’ 범인으로 구속된 강은 1심과 항소심에서 잇달아 사형을 선고받았다. 대법원 상고를 포기한 그에게 법원은 지난 7월 31일 형을 확정했다.

이변이 없는 한 강은 생의 마지막을 감옥에서 보낼 것이 확실하다. 살아있는 동안 두 번 다시 세상 빛을 보기 어렵게 됐다는 얘기다.


6개월 만에 모방범죄만 두 건

그러나 전국은 여전히 ‘살인마 강호순’의 악명에 숨죽이고 있다. 강이 검거된 직후인 지난 2월 전북 익산에서 20대 남성 2명이 여대생을 납치해 성폭행했다. 이들 역시 피해자에게 ‘섣불리 반항하면 강호순 사건처럼 된다’고 협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당은 피해자를 겁탈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간직하는 파렴치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수사팀은 겁에 질려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피해자에게 최면수사를 시도했다. 그 결과 피해자는 납치에 쓰인 차종과 지나온 이정표를 떠올렸고 이를 바탕으로 경찰은 범행 6일 만에 범인들을 붙잡을 수 있었다.

강호순의 사형이 확정된 지 한달이 채 못 된 지난달 18일에는 초등학교 동창사이인 세 남자가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 경찰서에 실려 왔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강남 대로변에서 귀가길 여성을 납치해 현금과 신용카드 등을 빼앗고 집단으로 성폭행한 방모(26)씨 등 3명을 구속했다.

방씨 일당을 조사하던 수사팀은 그들의 진술 내용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희대의 살인마 강호순이 우상’이라 떠드는 방씨 일당은 충남 천안의 야산에서 피해여성을 윤간하는 동안에도 강의 이름을 팔았다.

경찰은 이들이 강호순을 모방한 ‘카피캣’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수법이 확연히 다르고 단독범인 강호순과 달리 집단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이들을 강의 카피캣으로 모는 것은 무리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방씨 일당이 특정 연쇄살인범의 이름을 팔아 피해자를 겁주고 욕구를 채웠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일당에게 ‘강호순’은 단순히 상대 여성을 위협하려는 수단이 아닌 ‘구체적인 상징이자 무기’였던 까닭이다.


연쇄살인범 A “TV에서 시체 유기하는 방법 배웠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강력사건을 비롯한 각종 범죄행위 중 모방범죄가 발생하는 사례는 상당히 흔하다. 범행수법을 베끼고 진화시키는 ‘카피캣’의 출몰은 범죄세계에서 절대 특이하거나 드문 현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박형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자신이 얻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며 “다른 이가 비정상적인 방법(범죄행위)이나마 이를 충족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그 방법을 배우고자 하는 호기심이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특히 일부 언론의 선정적인 사건보도가 모방범죄를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유영철, 정남규 등 국내 주요 살인사건 피의자 30여 명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던 그에 따르면 살인 피의자 가운데 상당수가 TV, 신문 등 언론을 통해 살해수법 또는 시신 유기 방법 등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박 연구원은 “실제로 한 살인사건 피의자는 TV에서 여행가방에 시신을 넣어 유기하는 장면을 보고 이를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며 “범행수법에 대한 지나치게 상세한 묘사나 보도는 자제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사건을 다루는 매체들의 지나친 극적 묘사나 자세한 수법 재연 등이 잠재적 피의자들에게 완전범죄를 위한 ‘유용한 정보’로 악용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편 흉악범에 대한 얼굴, 신상공개가 모방범죄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박 연구원은 또 다른 부작용을 우려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흉악범죄자의 얼굴, 신상공개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면서도 “하지만 흉악범의 얼굴과 신상이 공개됐을 때 비슷한 욕망을 가진 잠재적 범죄자들에게 구체적인 ‘롤모델’을 제시하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범죄자 신상공개가 여러 순기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모방범죄 예방’이라는 측면과는 큰 연관성이 없다는 게 박 연구원의 설명이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도 카피캣?

1999년 부산·경남 연쇄살인범 정두영과 범행동기·수법 판박이

부유층 노인과 보도방 여성 등 무려 20명을 참혹하게 살해한 유영철도 누군가를 모방한 아류였다. 그가 모델로 삼은 인물은 1999년 부산·경남을 무대로 9명을 살해하고 8명에게 중상을 입힌 정두영이다. 유영철은 절도혐의로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2000년 정씨의 범행을 재구성한 모 월간지를 탐독하며 ‘살인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유영철은 체구가 작은 정두영이 자신에게 대항하는 남성을 육탄전 끝에 쇠망치로 제압하는 대목에서 큰 감명(?)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유영철은 범행도구로 직접 만든 쇠망치를 애용했다.

또 유영철이 젊은이나 남자들이 집을 비운 오전시간을 노려 부유한 노약자와 여성 가정부를 상대로 범행을 벌인 것도 정두영의 경험을 일부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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