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 | 박찬호 기자] 천년학, 임꺽정전, 묘청, 대조영, 연개소문, 사설정감록, 들불, 불만의 도시, 천산북로, 천추태후, 삼별초, 두고 온 헌사, 일간지 연재소설 30편, 양반전, 광대요 등의 희곡 발표. 중편소설, 유다행전으로 1969년 현대문학상, 1976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한무숙문학상 수상.
몇 년 전에 KBS대하드라마 ‘대조영’의 작가 유현종(75) 작가의 문학과 인생행전을 들어보았다. 아버지 없는 집안에서 먹고사는 문제는 절실하게 다가왔고, 그래서 그는 당장 권투선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참가한 전국대회에서 1차전을 승리했지만 2차전은 패하고 말았다. 그 때 최초의 절망과 좌절을 맛보았다.
가정형편의 어려움으로 그의 가족은 이사를 하게 됐다. 6·25직후였던 때, 이사 간 곳은 나중에 알게 됐지만 <태평천하>, <탁류>, <치숙>, <논 이야기>등 을 썼던 소설가 채만식 선생이 살던 집이었다. 갈 곳이 없이 낡은 초가삼간으로 도망치듯이 이사 간 것이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운명 같은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글 쓰는 걸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유현종 작가는 작가가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이삿짐이 들어가는데 마당에는 아직도 그 집에 살았던 사람이 가져가지 못한 책 짐이 남아 있었다. 열 권 쯤 묶은 짐은 대 여섯 개가 되었다. 서울로 이사를 간다는데 다른 짐은 모두 실어가고 책 짐만 남은 것이었다. 40여 세 되어 보이는 부인이 주인이었다. 유 작가는 말없이 그 짐을 골목 밖으로 내다 주었다. 부인은 고맙다며 소설 읽기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 중 한 묶음을 주었다.
“책을 좋아 하니?” “예.”
그랬더니??그럼 너 가져라.??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일곱 권의 소설 묶음은 모두 채만식 선생의 작품이었다.
이 집에서 살던 채만식 선생은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다. 채 선생은 일본 동경 와세다 대학교를 다녔고 동아일보기자를 하다가 ‘탁류’, ‘레디메이드 인생’ 등을 발표하여 한국 신문학 사상 가장 뚜렷한 풍자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소설가이다. 선생은 결핵으로 고생하다가 6·25가 나던 해,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투병 생활을 하면서 약 10년간 이 집에서 사셨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정말 우연하게 유현종 작가의 가족이 그 집을 사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책 선물을 하고 간 분은 채만식 선생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유현종 작가는 심심할 때마다 그 책을 한두 권 꺼내보았다. 처음에는 두 장을 채 넘기지도 못하고 덮어 버렸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여 두 권을 읽게 됐다. 그러자 마치 눈을 다시 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가가 되어서 밥 벌어 먹고 살자’는 생각이 든 것은 이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문학이 그를 구원한 것이었다.
“권투가 날 먹여 살릴 수 있을까?”
그는 권투를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업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지금도 그는 문학을 그 때의 그 분의 존재가 그를 구원했다고 확신한다. 글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당시 교사 이외에 선생님 소리를 듣는 직업은 의사와 작가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천신만고 끝에 유 현종작가는 갑류 장학생으로 서라벌예대(중앙대)문예창작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1961년 대학 2학년 때 <자유문학>에 응모한 소설 ‘뜻 있을 수 없는 돌멩이’로 신인문학상을 받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등단했다.
당시에는 등단 후 10년 안에 일간지 신문 연재소설을 쓴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그렇게 두세 편만 히트를 쳐서 출판하기만 하면 남은 인생은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유 작가는 서른셋의 나이로 동아일보에 소설 '연개소문‘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젊은 작가에게 역사소설을 맡긴 신문사측에서는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역사소설은 우리의 부정적인 과거만을 들추어내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의 긍지를 내세울 수 있는 소설로 ’연개소문‘을 선택했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연개소문은 쿠데타 이미지가 강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신문사에서는 노심초사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인물은 반체제 인사였기 때문에 그의 주도하에 밀어 붙였다. 하지만 재미있었던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연개소문’의 애독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을 ‘연개소문’이라고 생각하며 소설을 읽었을 터였다. ‘연개소문’의 인기는 대단했다. 당시 ‘동아일보 사태’라고 해서 3개월간 신문을 기사 없이 광고만 나왔던 일이 있었는데, 독자들이 ‘연개소문 보는 재미로 신문 본다.’고 자비를 털어 동아일보에 항의성 광고를 할 정도였다.
‘연개소문’을 쓰기 전인 20세 후반, 그는「유다행전」이라는 성경을 문학으로 육화시켜 중편소설을 쓴 적이 있다.
중편소설 유다행전은 1968년 ‘월간 현대문학’에 실렸고, 그 소설로 1969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당시만 해도 그 현대문학상은 소설가에게는 한국문단 질을 상징하는 보증수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당시 그 상을 받은 작가로는「별들의 고향」으로 1972년 같은 상을 수상한 소설과 최인호 작가가 있었다. 그 상을 통해 일간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것도 가능해졌고, ‘연개소문’같은 소설들을 신문에 연재할 수 있었다. 젊은 그에게 문운, 재운을 맺은 셈이었다. ‘포니’도 나오기 전이었는데 그는 운전기사를 대동해 외제차 ‘포드’를 몰고 다녔다.
MBC-TV가 창사 3주년 기념 매일 연속극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상금은 200만원, 그 돈은 당시엔 괜찮은 집 한 채 값이었으니 거금이었다. 그는 당선되었고, 이후 10년간 드라마 극본에 매달렸다. 방송극본은 다방면에서 재주가 있어야 손댈 수 있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한 극본을 2, 3번고치는 것도 예사여서 녹화 당일 말고는 쉴 수가 없었다.
희곡은 다섯 편을 썼다. 장편소설「들불」은 뮤지컬로 제작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집 앞에는 소설가 지망생과 배우, 가수, 탤런트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 당시 만난 사람들 중 지금도 한국 가요 사상 가장 뛰어난 가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용필 씨가 있었다. 노래 잘 하는 사람 한 명 있다.‘는 주변의 소개로 만나게 됐는데, 당시에는 노래보다 기타를 더 잘 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후 유 작가는 그와 형제처럼 지냈다. 그의 일대기는 다른 뮤지컬「서울 신라-예술가의 초상」을 집필하기도 했다.
하는 일마다 잘 돼 20년 간 순풍에 돛을 단 듯 했던 그의 인생에도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인들이라면 아직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을 ‘IMF사태’는 그에게도 쓰라린 기억이다. 작가는 IMF와는 별로 관계없을 것 같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경제위기가 닥치자 주요 일간지들은 원고료가 많이 드는 신문 연재소설을 가장 먼저 없애버렸다. 그로 인해 일정 수입이 없어진 유현종 작가에게는 엄청난 심리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직자가 된 기분이었다. ‘인기’라는 게 정말 사람을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당시에 그는 심리적 공황상태를 겪고 있었다. 신문에 그의 이름 석 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렇게 스트레스가 될 줄은 몰랐다. 누가 한 방을 때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가슴에 통증이 왔다. 진땀이 났다. 그 길로 병원에 실려 갔다. 병원에서 손등에 링거 줄이 빠져나간 줄도 모르고 병원 바닥에 엎드린 채 소리치며 울부짖고 있었다.
“십 년 전에 심근경색으로 쓰려져 막힌 혈관에 스텐드 시술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그곳이 다시 막힌 것 같아 입원해야합니다.”
심장의 혈관이 막히면 막힌 곳에 터널용 철망을 집어넣어 좁아지지 않게 시술을 하는데 그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삼 일이면 퇴원할 수 있다는데 다시 검사를 받아 본 그와 가족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장에서 나오는 동맥 두 군데가 막혔는데 그건 철망을 집어넣는 스텐드 시술로는 안 되고 팔이나 다리에서 동맥 혈관을 잘라내어 고장 난 심장 동맥혈관에 이식 접합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수술이었고, 위험천만한 수술이기도 했다. 전신을 마취해도 심장은 뛴다. 가사상태라 하더라도 심장이 멎으면 사망하기 때문이다. 고장 난 혈관은 그 심장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심장이 뛰고 있으면 수술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술을 하자면 심장을 멈추게 해야 한다. 심장이 멎으면 당장 죽기 때문에 편법을 쓴다. 인공심장으로 교체하여 뛰게 하고 원래의 심장은 멎게 한다. 급속 냉동하여 멎은 상태에서 혈관이식 접합수술을 끝내야만 한다. 문제는 그 수술시간이다. 길면 8시간, 짧아도 6시간 이상 걸린다고 한다. 그 8시간 동안 그의 숨은 멎을 것이고 죽음의 시간, 정지된 시간 속에 누워있게 된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8시간 동안 죽는 것이다. 아니 수술이 잘못되면 영원히 죽을 수도 있다. 가족들에게 죽어도 병원과 의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수술 동의서를 썼다.
하루 대여섯 가지 검사를 마치고 나니 체력이 바닥이 나서 물 마실 힘도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밤부터 금식하고 온 몸을 소독하고 관장하는 일이었다. 수술대에 올라간다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기요틴이라는 단두대가 있다. 사형수의 머리를 작두 위에 올려놓게 하고 십 미터 높이로 끌어올린 도끼날을 순간적으로 내려뜨려 목을 자르는 처형법이다. 그는 마치 단두대에 올라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듯 했다.
“살려주세요. 제가 무슨 죽을죄를 지은 게 있어 이런 시련을 내리십니까. 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의 가슴에 못 박은 사실도 없으며 손가락질 받은 적도 없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요나처럼 살려 달라 외쳤다. 한편으로는 큰 죄 지은 게 없다고 항변하며, 여러 사람을 원망했다. 그러나 눈물을 쏟으며 울다보니 그분의 손을 뿌리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으며 죽을죄를 지었다는 죄의식이 솟아났다.
유 작가는 쓰러진 후 중환자실에서만 한 달을 보냈다. 그곳은 온통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사람들뿐이었다. 죽어 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중환자실은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는 곳이라 외로움에 떨어야 했다. 그런 그에게 투병중인 후배작가 최인호가 찾아와 위로를 해 주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겪고 난 후였기 때문인지,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위안이 됐다. 결국 유현종 작가는 병과 싸움에서 승리했다. 수술은 성공이었고, 하지만 퇴원하자마자 유 작가는 또 다시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
유현종 작가는 그 분과 멀리 떨어져 있은 적도 있었지만, 그를 내버려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한국 역사소설 속에서 이광수의「흙」,손창섭의「길」,박완서의「휘청거리는 오후」, 유현종의「연개소문」은 한국의 4대 역사소설로 지금도 기록되고 있다. KBS에서 방영된 유현종의 작품 ‘대조영’은 30년 전에 경향신문에 연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현재 쓰고 있는 소설「사도바울」은 올 상반기에 1500매 두 권 분량으로 집필 하고 있고, 거의 완성 단계에 있다.
50년 작가 생활을 하면서 유 작가는 그 분을 제대로 만난 15년만이 그의 전부의 삶이라고 우기며 살고 있다. 왜냐면 그 분 앞에서 내세울만한 작품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이제 소설 사도바울을 통해 그 분 곁으로 가기 전 그 분이 기뻐 받으실 만한 작품하나를 가지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chanho227@ilyoseoul.co.kr
박찬호 기자 chanho2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