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영화감독은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장호 영화감독은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박찬호 기자
  • 입력 2015-02-17 12:12
  • 승인 2015.02.17 12:12
  • 호수 1085
  • 5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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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기자가 만난 사람들] 이장호 영화감독

빈민운동의 아버지 최흥종. 서서 평(엘리제 셰핑)의 일대기 영화화
내리막 길 겪다보니 세상 바로 보여

[일요서울 | 박찬호 기자] 29세의 젊은 나이에 영화 ‘별들의 교향’(1974)으로 화려하게 데뷔, 당시 한국영화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의 신호탄이 된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을 비롯해 ‘바보선언’, ‘낮은 데로 임 하소서’(1981)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 다’(1987)등 20여 편의 작품을 연출하며 한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은 이장호 감독(70세). 한국영화 100선에 4편의 작품을 올린 이장호 감독. 그가 19년 만에 새로운 작품 ‘시선’을 가지고 우리 곁에 다가왔다. 지난 해 11월에 있었던 제 1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의 비전’ 부문에 초청된 ‘시선’은 영화관계자들과 관객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며 자신을 이제 시작하는 ‘신인 감독’이라 소개하는 이장호 감독을 2015년 2월 11일 일요서울에서 만났다.

“고난의 시간들을 무려 28년을 겪었지요. 87년도에 여덟 편의 작품이 제작에 실패했고, 집도 경매가 들어가고, 교통사고도 크게 나고….

개인적으로는 혹독한 시련기였고, 내리막길이었습니다. 보통 그렇게 오랜 시간 내리막이면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그분께서 제 인생에 지속적으로 브레이크를 잡아주셨습니다.”

1974년‘별들의 고향’으로 감독 데뷔한 이장호 감독은 이어‘어제 내린 비’(1975)로 롱런을 기록하며 70년대 한국영화에 ‘새로운 물결’의 기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너 또한 별이 되어’(1975)에서 흥행에 연속 실패를 거듭했다. 여기에 1976년 대다수 연예인들이 대마초에 연루되는 큰 사건이 터졌다. 그 역시 그 사건에 동참된 것이다. 그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당시 할머니들이 대학가에 앉아서 대마초를 파는 일은 흔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접했을 형태였지요. 기억으로는 저도 두 번 피웠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연루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년 동안 활동정지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는 그에게서 ‘고통의 나날’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는 일이 잘 되면 내가 잘 나서 된 것이고, 못 되면 사회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교만하고 어리석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것은 모두 그분께서 가야할 길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라고 회고한다. 그가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은 총 20여 편. 흥행과 실패의 비율은 50:50이었다고 한다.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받을 디디게 된 것에는 그의 아버지인 故이재형씨의 권유 때문이었다.

“‘공부 안하니까 너 영화나 해라’ 하신 거죠. 당시엔 영화는 공부 안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었어요.”
홍익대학교에서 건축예술을 전공하던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1965년 신 필름 연출부에 입문하여 신상옥 감독 문하에서 사사했다. 그리고 1973년까지 8년을 조감독으로 있다가 1974년에 감독으로 데뷔를 한 것이다.

“당시 신상옥 감독님은 사극만 하시는 겁니다. 연출부터 육체노동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몸이 건강해야 가능한 일이었어요.”

본인은 강력한 의지도 없이 시작해서 ‘막노동 섞인’ 그 일을 지금껏 해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이장호 감독은‘다른 건 할 줄 몰랐어요.’라고 대답했다.

무엇보다 이 감독의 재기 작 이자 가장 강한 애착을 주는 작품은‘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다.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4년을 쉬다가 다시 노선진입을 해야 했던 그는 쉬는 동안 심취해 온 한국소설의 리얼리즘, 특히 문학 평론가 염무웅 선생의 ‘민중문학론’은 역사·사회를 의식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제가 재기했던 시점은 박정희 시대가 끝난 때였죠. 그래서 사실주의 작품이 먹혀 들어간 것 같습니다.”

이때 이 작품은 1980년 11월 명보극장에서 36일간 개봉,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 10만은 대단했다. 그리고 제 19회 대종상 감독상 및 제19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부분 작품상, 대상까지 수상한 작품이다. 게다가 이 작품으로 국민배우 안성기 씨가 주연급 배우로서의 데뷔를 하게 됐고, 그뿐만 아니라 영화계의
거장 배창호 감독이 조감독으로 영화를 시작한 영화이기도 했다.

“지금의 박광수, 장선우감독 같은 영화 쪽 엘리트들이 그때는 모두 저에게로 왔죠. 뿌듯한 것은 강우석 감독은‘바람 불어 좋은 날’을 보고 ‘나도 영화하겠다.’란 생각을 품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우리가 영화를 만들었던 시대는 감독들이 만들고 싶은 영화의 30-40%밖에 못 만들었습니다. 한편의 완성된 영화는 대략 9천 피트의 필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작사측에서는 많아야 3만 정도, 그러니까 3배 정도만을 줍니다. NG가 거의 힘들죠. 요즘에는 30만 피트가 주어지니 우리보다 10배 이상의 좋은 환경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는 담담히 지난 시간들이 깨달음을 통해 자신을 자라나게 하셨던 시간이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그 시간을 ‘아름다운 내리막길’이라고 생각한다.

긴 시간 동안 직접 영화를 연출하는 일은 떠나 있었지만, 평생 직업이 영화감독이다 보니 그 시간 동안 학교에 있으면서 후학을 양성하느라 바빴다. 그는 현재 서울 영상위원회위원장과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 부학장을 맡고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시선’은 그가 엔도 슈샤쿠의 <침묵>이라는 일본소설을 읽다가 떠오른 ‘순교’와 ‘배교’에 대한 생각들을 지난 2007년 발생한 아프가니스탄 한국인피랍사건과 결합시켜 만든 작품이다.

“소설 <침묵>에서는, 개화기시절 포르투갈 신부가 일본에서 ‘배교’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했고, 결국 신부의 신분을 내려놓게 되죠. 이때 교황청에서는 그의 신부의 자격을 박탈하고 공식적인 ‘배교자’로 낙인이 찍힙니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 현지인과 결혼, 끊임없이 구제와 봉사활동을 하며 끝까지 그들을 섬기죠. 인간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배교자’이지만, 절대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순교자’였던 겁니다. 이를 한국에서 영화화 하려면 조선개화기로 바꿔야 하는데,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고민하다 지난 2007년 발생한 아프가니스탄 한국인피랍사건과 결합해 지금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겁니다.”

‘납치된 이들과 납치한 이들, 그 사이에서 강요되는 배교. 우리가 그러한 상황 속에 처해진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우리의 기준과 절대자의 기준은 과연 어떤 것일까?’를 묻고 싶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약 50여 일간 캄보디아 밀림지역에서 수십 명의 스탭들과 배우들이 동고동락을 했지요. 특히 하필 영화제작을 하던 시기가 우기라서 시시 때때로 천둥과 벼락은 사랑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저 멀리서 보이는 번개가 마치 폭죽이 정신없이 터지는 것처럼 번쩍이고, 소리는 엄청났죠. 무엇보다 디지털 장비들이 벼락에 훼손될까 방비들을 보호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온갖 곤충들과 더위, 국경지대 곳곳에 있는 지뢰지대 등 어려움이 많았지요. 이 모든 일들을 이겨내고, 함께 해준 스텝들, 배우들에게 이 자리를 빌 어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이번에 영화를 함께 만든 이들 안에는 비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들과 함께 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도도 깊어지고, 저 자신이 배우는 점도 참 많았습니다.”

최근 가까운 지인들을 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함께 했던 최인호 작가, ‘시선’이라는 영화가 유작이 돼버린 배우 박용식씨(학교 후배이자 같은 실업인회 회원)를 먼저 하늘로 보냈지요. 인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며 ‘나도 내 친구처럼 아름답게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해야 겠다’고 결심하며 기도하게 되었고, ‘시선’이라는 영화를 찍으며 정말 순교의 길을 가게 된 박용식 씨와 가족을 보며 성숙한 예술과 삶의 자세를 깊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장에 갔는데 아내 되는 분이 펑펑 우시며 “남편에게 하나님 앞에 평생 기억될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겨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셔서 오히려 저를 울리셨습니다. 그 성숙함에 묵상이 되더군요. 그는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과거와 달라졌음을 고백한다. 과거엔 개인의 인기와 돈벌이를 위해 영화를 만들었고, 그러다보니 돈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한 시간들을 보냈지만 아름다운 내리막길의 끝에서 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됐다는 것이다.

“절대자의 시선이 중요한 책임 있는 영화인이 되고 싶은 소망이 일어났지요.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무엇으로 사는가, 믿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첫 열매가 바로 ‘시선’입니다.”

그는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과거와 달라졌음을 고백한다. 과거엔 개인의 인기와 돈벌이를 위해 영화를 만들었고, 그러다보니 돈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한 시간들을 보냈지만 아름다운 내리막길의 끝에서 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됐다는 것이다.

다음 영화를 기획하고 계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96.5’라는 작품인데 1985년 바다 한가운데를 떠돌며 생사의 기로에 섰던 베트남 난민인 보트피플 96명을 구해준 원양어선 선장이었던 전제용 씨의 이야기입니다. 이 일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다시 일하지도 못하게 되고, 행방조차 묘연해진 전제용 선장을 기억하며 당시 구출 받았던 베트남인들이 20년을 수소문 끝에 결국 전제용 선장을 찾아내게 됩니다. 이 일로 베트남 본토인들이 한국을 사랑하게 되죠. 한 사람의 희생과 섬김이 수 십 년 만에 한 나라도 일구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게 됩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요즘 이 일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감동스토리가 될 듯합니다. 또 한편의 영화는 ‘아름다운 생애’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구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빈민운동으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린 최흥종(1880-1966년)의 일대기와 처녀의 몸으로 가난한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일계 미국인 서사평(본명, 엘리제 셰핑.1880-1934년)의 일대기의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감독님에게 절대적인 분은?

“저를 자상히 제 곁에서 항상 지켜보시며 보호하시는 분이시죠. 그러면서 강한 의지로 저를 훈련시키는 바람직한 교육자이시기도 합니다. 부모님조차 그렇게 못하지요. 저는 이런 그분을 통해 내리막길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지난 사람만이 자기인생에서 미션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치 저는 사법고시 준비생 같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절대자가 자상히 곁에서 항상 지켜보시며 보호하시는 분이면서 강한 의지로 저를 훈련시키는 바람직한 교육자이시기도 하다.

“저는 이런 절대자를 통해 내리막길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지난 사람만이 자기인생에서 미션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을 ‘사법고시 준비생’으로 비유한다. 고시생이 법을 외우지 않으면 시험에 패스할 수 없듯이 삶속에서 말씀으로 영혼을 살찌우지 못하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지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삶속에서 그분을 입력시키려면 영혼을 살찌워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이지요. 그 문을 통과할 자격은 영혼을 살찌우는 말씀을 늘 묵상하고 기억해야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chanho227@ilyoseoul.co.kr 

박찬호 기자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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