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학예직 자중지란 초래한 총독부 철거
[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학예직 자중지란 초래한 총독부 철거
  • 조아라 기자
  • 입력 2015-02-17 10:23
  • 승인 2015.02.17 10:23
  • 호수 1085
  • 60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4. 팽팽히 맞선 찬반 여론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는 총독부 건물 철거를 「국책사업」으로 시행할 것을 지시했다. 문화체육부에서는 철거를 어느 부서와 기관이 담당할 것이냐에 대해 의견을 수렴하게 됐다. 본인은 당시 박물관장으로서 “총독부 철거와 같은 방대한 사업을 치를 행정적 능력이 없음”을 역설했다. 하지만 실국장과 기관장 등은 “박물관에서 현재 그 집을 사용하고 있으니 사용자가 철거하면 그 다음에 문화재 관리국에서 복원사업을 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니 당시 박태권 차관은 “철거사업은 박물관에서 맡으십시오” 라고 결정을 내려버렸다.

그때부터 본인과 박물관이 총독부건물 보존이냐 철거냐의 격렬한 논쟁의 와중에 휩싸이게 됐다. 신문과 방송은 ‘국책사업’으로 시행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이 문제를 소일거리처럼 다뤘다. 우리나라는 외국과 달리 국가적인 큰 사업이 있으면 언론과 각계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좋은 방향으로 합의점에 도달하려 하지 않는다. 언제나 무조건 상대방을 공격해 결국 날선 공방으로 분열과 반목으로만 치닫는다. 총독부철거 문제도 결국 극단으로 치달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본인은 원칙적으로 총독부 철거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박물관을 옮긴다는 것은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총독부 철거 이전에 직제를 개편해 정해 놓고, 어떤 박물관을 지을 것을 정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 박물관을 지은 후 안전하게 이사하고 나서 철거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철거와 보존의 논쟁이 시끄러워지자 대통령은 총독부 철거와 함께 국립박물관에서 보고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신관 건축 계획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박물관 신관 건립도 국책사업으로 시행하라는 결재를 내렸다. 이는 얼른 총독부를 철거하라는 지시였다. 
 
그때만 해도 ‘철거냐 보존이냐’는 여론은 반반이었다. 당시 당과 언론의 추이를 보면 여당과 동아일보는 철거를 지지했다. 반면 야당과 조선일보, KBS는 보존을 지지했다. 대통령의 지시가 있고난 다음 여론이 벌집 쑤셔놓은 상태에서 언론은 “박물관장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고 취재하러 몰려왔다. 나는 “원칙적으론 철거에 찬성하지만 문화재의 안전을 위해서 철거를 조급히 서두르는 것은 반대”라며 “새 박물관을 짓고 문화재를 옮기고 난 다음에 철거하는 것이 순서”라고 했다. 
 
그랬더니 언론은 본인이 길게 설명한 것은 거두절미하고 “박물관장도 철거에 반대한다”고 대서특필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청와대에서 노발대발했다고 전해졌다. 광복회 등 독립지사와 철거를 지지하는 학계에서 “정 관장 저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니면 어떻게 철거를 반대하느냐. 저 사람을 그냥 둬서는 안될 것”이라며 심한 말이 오고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학계에서는 정병학, 신용하, 정창열, 안휘준, 문명대 등이 철거를 적극 지지했다. 반면 임창순, 진홍섭, 한병삼, 이난영, 강우방, 강기옥 변호사 등은 보존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찬반 공청회도 열리고 찬반논쟁은 계속됐다. 그런 와중에 국립박물관 내에서, 더욱이 학예직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학예직들이 총독부 철거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모은 것이다. 총독부 건물은 그대로 보존하고 새로 박물관 건물을 짓고 나서 이전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참으로 창피한 이야기다. 
 
전부 본인의 부덕한 소치다. 관원의 의중을 짐작하지 못하고 통솔력 부족으로 인한 소치였다. “외부의 사주에 의한 내부반란”이라고 말하는 직원도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학예직을 전부 모이게 한 자리에서 각자의 의견을 듣고 나의 소신을 이야기했다. 그때 학예직들은 반 이상이 철거반대와 보류였다. 
 
그 이유는 첫째는 철거 반대였다. 둘째는 새 박물관을 짓고 난 다음 이사한 뒤 철거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과장급 학예직 등이 주동해 ‘철거 반대서명 운동’을 벌이고 연판장을 만들어 청와대로 직접 보내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학예직 회의에서 그들을 설득해 “연판장을 관장에게 맡겨라. 그러면 내가 청와대에 가서 우리 학예직의 의견이라고 보고를 하겠다”고 하며 연판장을 내가 맡았다. 
 
그리고 며칠 후 청와대 교문수석실 김정남 수석을 만나러 가서 그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랬더니 김정남 수석이 웃으면서 “관장이 가지고 있는 연판장 원본의 사본을 연판장 만든 직원들이 만들어 청와대에 이미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젊은 학예직들이 문화재 사랑을 위해 한 혈기왕성한 행동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넘길 터이니 관장님도 그대로 넘기십시오”라고 했다. 그 주모자들이 공부도, 일도 열심히 하는 학예직이라서 다음 승진 때 두 사람을 제일 먼저 승진시켜주기도 했다. 
 
그때 김정남 수석은 우리 박물관에 대해 아주 호의적으로 대해 줬다. 지금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김 수석에게 “나는 총독부 철거에 찬성입니다 그러나 박물관 이전은 매우 큰 문제이므로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먼저 새로 훌륭한 박물관을 세울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여러 전문가와 협의해 꼼꼼히 따져본 연후에 장관에게 보고하고 대통령의 결재를 국책사업으로 올릴 것이니 적극 협조해 주십시오”라 했다. 김 수석은 이 이야기를 “당연한 주장”이라며 흔쾌히 받아드렸다. 
 
그렇게 해서 2005년 새 박물관이 건립됐다. 단군성조 개국 이래 처음으로 우리 정부가 ‘우리의 박물관’을 입안, 결정, 건립한 것이다.
 
▲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청화백자 철채투각포도문화분대(한쌍)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높이31.2cm~32.1cm
 
18,19세기 청화백자 준(키가 큰 항아리)에는 분재문(화분에 심은 대나무 파초, 매화 등)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분재를 올려놓은 받침대가 나무로 짠 사각형의 나즈막한 탁자가 거의 대부분이다.
 
여기 소개하는 백자 화분받침은 원통형 백자의 표면을 횡으로 사분할하고 상단에 좁은 당초문대를 종속문으로 했다. 그 밑 제 이단인 넓은 면에는 주문인 포도문에 원숭이가 곁들여있다. 그 밑에 제 삼단에 좁은 종속문대가 있고, 제일 밑인 사단인 하단이 넓게 퍼지면서 높직한 족부(足部)가 된다. 
 
받침대 위에는 구멍이 뚫리고 1~2단은 흔히 볼 수 없는 투각이다. 주 문양인 포도에 곁들여진 원숭이는 철사를 칠하고 그 밑의 좁은 종속문대에는 안상문과 원공을 투각했다. 그 양 옆에 간결한 필치로 청화 칠보문을 그렸다. 제일 밑 족무에도 역시 간결한 필치로 난 옆에 해랭꽃을 청화로 그렸다.
 
이와 같은 형태로 백자의자가 있는데 위에 구멍이 없고 위가 펑퍼짐하고 옆에 턱이 없는 것은 「돈」이라 한다. 
 
조선백자에는 투각이 아주 귀한데 화분받침 돈에는 투각으로 청화로 문양이 있는 것을 보면 화분문양이 있는 준(키 큰 항아리)과 같이 18-19세기 청공·청완(淸供 · 淸婉) 생활상의 일변을 보여주는 귀한 예이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