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대위 “현장 목소리 외면한 낙하산 인사 반대”
한 단장 “지켜보지 않고 평가 유감… 사퇴 안해”
지난 5일 오후 5시께. 서울 광화문 동화 면세점 앞에서 오페라가 울려 퍼졌다. ‘한국 오페라 비상대책위원회’가 한예진 국립오페라단장의 자진사퇴를 촉구하는 자리를 가진 것이다. 비대위는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낙하산 인사 NO, 부당한 임명 절차 규명하라. 경험 없는 ‘갓난아기’에게 100억 예산 웬 말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페라인들이 거리로 나오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현장 경험 부족
비정상적인 인사 결정”
국립오페라단장 자리는 지난해 3월 당시 김의준(64) 단장이 사임한 이후 10개월 째 공석이었다. 김 전 단장의 사임 이후 두 명의 후보가 추천됐으나 같은 해 4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면서 선임절차가 지연됐고 결국 흐지부지됐다. 이후에도 세계적인 성악가들의 이름이 국립오페라단장 자리에 오르내렸지만 최종 낙점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달 2일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립오페라단 신임단장 겸 예술감독에 한예진(44·여) 상명대 산학 협력단 특임교수를 임명한다고 밝혔다. 한 단장은 밀라노 베르디 국립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유럽과 일본에서 오페라 소프라노 가수로 활동한 바 있다. 문체부는 한 단장에 대해 “현장 경험이 많아 세계 오페라 흐름 파악에 안목과 기량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오페라계는 문체부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한국성악가협회, 대한민국민간오페라연합회, 예술비평가협회, 대한민국오페라포럼 등 7개 단체가 뭉쳐 한국 오페라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국립오페라단장 인사는 묵과할 수 없는 최악의 인사”라고 비판했다. 비대위는 한 단장에 대해 “경험이 부족한 낙하산 인사”라며 “임명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대위는 유럽에서 활동하는 현직 정상급 성악가 가운데 한 단장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없고, 한 단장의 활동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고 지적했다. 문체부의 ‘(한 단장은) 현장 경험이 많다’는 평가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비대위는 한 단장의 자진사퇴뿐만 아니라 인사 정책의 개선도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달 14일 ‘국립 오페라단의 역할과 정체성 제고를 위한 긴급 토론회 및 성명서 발표’란 이름으로 진행된 토론회에서 비대위 측은 이번 사태가 문화 행정가들의 일방적인 진행으로 벌어진 사태라며 정부의 낙하산 인사, 밀실인사 라고 비판했다.
“한 단장 이력서
청와대로 직접 들어가”
이날 자리에서 장수동 한국소극장오페라연합회 회장은 “주무부처 과장까지도 어떻게 인사가 이뤄졌는지 모른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박현준 한강오페라단 단장은 문체부가 아닌 청와대가 한 단장의 이력서를 직접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박 단장은 “한 단장을 반대한다는 서명을 받아 청와대에 전달하고자 했다. 그런데 문체부는 ‘우리 손을 떠났다. 우리는 힘이 없다’고 말했다”고 폭로했다. 한 단장을 두고 낙하산 인사, 밀실 인사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게다가 문체부가 배포한 보도 자료에서 한 단장의 상명대 산학협력단 특임교수 경력을 2003년이라고 명시, 실제보다 11년 많게 기록된 사실도 발견됐다. 한 단장이 상명대 특임교수를 맡은 것은 2014년이다. 그러나 문체부는 2003년은 2013년의 오타라고 해명했다. 실제 오타라고 할지라도 2014년을 2013년으로 잘못 기록한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에 비대위 측은 한 단장이 경력을 부풀려 기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어 지난달 29일에는 한 단장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고발했다. 비대위 관계자는 “한 단장이 경력을 부풀려 기재했고, 다른 경력에 대해 검증할 수 있는 자료를 요청했지만 내놓지 않고 있다”며 “이를 조사해달라는 요청을 위해 검찰에 고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젊은 부분 장점 될 수 있어
열정으로 잘 이끌 것”
이 같은 오페라계의 반대 분위기에 대해 한 단장은 “갓 태어난 아이인데 지켜봐 주지 않고 평가하는 것은 유감”이라며 서운함을 표시했다. 그러면서도 “사퇴 의사는 없다. 열정으로 잘 이끌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한 단장은 지난 3일 예술감독 취임 및 2015년 사업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 단장은 자신의 임명과 관련된 논란에 대해 “임명은 문화부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오페라를 제작한 적은 없다. 제작사로서 경험은 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비대위 측에서 제기한 경력 부풀리기 의혹에 대해서는 “처음 문화부에서 발표한 것처럼 오류가 있었던 것이 맞다”며 “의도적인 행동이 아닌 오타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경력 1,2년을 불린다고 해서 실익은 전혀 없다. 검찰조사에서 다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력증명서를 제대로 제출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대답을 피했다.
앞서 비대위는 유럽에서 활동하는 정상급 성악가 중 한 단장의 활동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다면서 경력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한 단장은 “이탈리에 카스텔란자의 작은 지역에서 ‘라 트라비아타’로 데뷔를 했고, 그곳에서 여름 페스티벌 등 큰 무대에 많이 섰다”며 “솔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밀라노 베르디국립음악원에서 열어주는 독창회 무대에도 올랐다”고 말했다. 또한 비대위의 자진사퇴 촉구에 대해서는 “미션을 수행하게 1~2년은 지켜봐주길 바란다”며 사퇴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한 단장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오페라계의 냉랭한 반응은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경력에 대한 의혹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페라계는 한 단장의 사퇴와 동시에 오페라계와 소통, 투명한 인사과정 공개 등을 요구하고 있다. 오페라계는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경우 국립오페라단 공연 출연 거부 등의 조치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예술인이 본업에 힘쓸 수 있도록 관계당국의 결단이 필요해 보인다.
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