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통장
아내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통장
  • 오두환 기자
  • 입력 2015-02-09 10:07
  • 승인 2015.02.09 10:07
  • 호수 1084
  • 3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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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폰뱅킹 불가, 비밀번호 알아도 소용없어요

[일요서울Ⅰ오두환 기자] ‘비밀계좌’ 하면 떠오르는 곳이 스위스다. 스위스는 비밀금고와 비밀계좌로 전 세계의 비자금을 끌어들이고 있다. 실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수십억 달러를 숨겨두고 미국 자산가들도 세금 회피 차원에서 스위스 비밀계좌를 애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스위스 정부는 자국 은행에 외국인이 개설한 계좌 정보를 외국 조세 당국과 자동으로 교환하는 내용의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4월 말 최종 법안을 확정하고 2018년이면 정보 자동교환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될 예정이다. 스위스에서 비밀계좌의 명성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가운데 국내에서는 반대로 비밀계좌가 새롭게 생겨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계좌 수 2년 만에 14만 5000개로 크게 증가
신분증만 있으면 통장 만드는 데 5분도 안 걸려

해외에서는 거금을 가진 자산가들이나 유명인들이 비밀계좌를 이용하지만 국내에서는 주로 직장인들이 비밀계좌에 큰 관심을 갖고 직접 사용하고 있다. 현재 시중은행 6개에 개설돼 있는 비밀계좌는 14만 5000개로 알려졌다.

직장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비밀계좌

지난해 11월 결혼을 한 직장인 A씨는 요즘 고민거리가 있다. 예비 아내 몰래 갖고 있던 현금과 주식 등을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 걱정이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 연봉이나 주거래 은행 등은 아내에게 공개해 문제 될게 없지만 그동안 틈틈이 모아놓은 돈으로 샀던 주식 500만 원과 적금 300만 원 등은 아내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이 돈은 결혼 후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비상금 용도로 갖고 있던 돈이다.

하지만 공인인증서까지 공유하는 마당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비상금 통장을 들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비상금을 공개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내의 바가지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불안한 날들을 보내던 A씨는 직장 선배 B씨에게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비밀통장 이야기다. B씨는 자신의 비밀통장은 인터넷 뱅킹으로 조회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가족이 가더라도 통장의 유무는 물론 계좌의 돈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A씨는 B씨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B씨가 추천해준 은행에 가서 직접 비밀통장을 만들 수 있었다.

본인 아니면
계좌번호 찾을 수 없어

‘비밀계좌’ ‘스텔스통장’ ‘멍텅구리통장’ 이라고 불리는 비밀통장은 시중 대부분의 은행에서 개설할 수 있다. 절차도 일반통장을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특별한 심사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누구나 만들 수 있다. 은행에 따라 비밀통장을 ‘보안계좌’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스텔스통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최신 전투기 스텔스가 적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듯이 통장이 인터넷뱅킹 등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밀통장은 본인 외에는 조회도 거래도 불가능하다.

비밀통장은 설정에 따라 본인이 은행을 직접 방문해야만 입출금이 가능하다. 지정한 현금자동인출기기에서만 돈을 인출할 수 있도록 설정할 수도 있다. 체크카드를 발급받지 않으면 은행에 직접 가야 거래도 할 수 있다. 인터넷뱅킹이나 모바일뱅킹은 사용할 수 없다.

비밀통장을 개설하는 법은 간단하다. 은행원에게 인터넷으로 조회가 불가능하도록 설정해 달라고 하면 된다. 즉시 발급받은 계좌나 기존 계좌 모두를 인터넷 상에서 감출 수 있다. 실제 비밀통장으로 설정된 계좌는 인터넷뱅킹, 텔레뱅킹, 스마트폰앱으로 살펴봐도 계좌를 찾을 수 없다. 굳이 방문하기가 귀찮다면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도 ‘보안 계좌’ 설정 버튼을 클릭하기만 하면 간편하게 비밀통장을 개설할 수 있다.

전자금융사기 방지용
계좌 수 꾸준히 증가

비밀통장은 A씨와 B씨처럼 주로 직장인들이 많이 사용한다. 비상금이나 보너스 그리고 일시적으로 생긴 목돈을 남몰래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 통계에 의하면 이용자 과반이 남성이고 여성은 35%를 차지했다.

기존 계좌보다 사용방법이 불편하지만 많은 직장인들이 남몰래 비상금을 만들고 싶거나 보안에 각별히 신경 쓰거나 하는 사용자와 자산가 등이 많이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취재진이 서울 시내 한 은행에 들러 직접 비밀통장을 만들어 봤다. 통장 개설절차는 일반 통장 개설절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분증 하나만 있으면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은행원에게 이 비밀통장을 만들러 오는 사람들이 많냐고 묻자 “매일매일 오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비밀통장은 일상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은밀한 계좌를 가질 수 있다는 뿌듯함과 신비함 때문에 꼭 이용하지 않더라도 통장을 개설하는 경우가 많다.

당초 비밀통장은 지난 2007년 금융감독원이 보이스피싱 등과 같은 전자금융사기로부터 개인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으로 만든 상품이다. 인터넷 계좌이체를 유도하는 전자금융사기에서 인터넷·모바일 거래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피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출시됐다.

취재 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비밀통장이 언론에 알려지자 하루에도 몇 통씩 아내들이 남편의 통장 개설을 확인하는 문의 전화가 오고 있단다. 하지만 은행에서는 이들의 민원을 확인해 줄 수 없어 난감한 상황이다. 은행권에서는 당분간 비밀통장의 인기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동안 비밀통장에 대한 홍보 없이도 계좌 수가 2012년 말 8만1892개에서 2014년 말 14만5000개로 크게 늘었다.

freeore@ilyoseoul.co.kr

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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