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박 소장파, 친이계, 김무성계 골고루 지지
청와대 참모 일부도 경선에서 유승민 지원說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농사는 TK가 짓고 수확은 PK가 다 걷어간다.”
박근혜 정부의 산실(産室)인 대구·경북(TK) 주민들이 자주 하던 말이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은 TK에서 80%대의 몰표를 받아 당선됐다. 하지만 이후 정부 요직은 부산·경남(PK) 출신들이 독차지했다. TK 정서는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다 TK의 새로운 희망이 나타났다. 2월 2일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주영 의원을 여유 있게 따돌리고 집권여당의 ‘넘버2’에 오른 유승민 원내대표다.
유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의 5년 임기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시기에 여당 원내사령탑에 올랐다. 그는 박 대통령이 당 대표 시절 비서실장이었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는 정책과 메시지 총괄본부장을 맡았다. 이후 박 대통령을 향해 ‘쓴소리’를 자주 하는 바람에 다른 친박계 핵심들의 견제를 받아 거리가 멀어졌다.
“나는 영원한 친박이고…”
그러나 유 의원은 경선 기간 내내 “나는 영원한 친박이며,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누구보다 원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당선 소감을 밝히면서도 “저와 박근혜 대통령과의 오랜 관계에 대해 여러 오해를 받는 게 그동안 참 안타까웠다. 대통령이 남은 3년 임기를 성공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박 대통령도 유 원내대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여전하다고 한다. 유 원내대표가 워낙 귀에 거슬리는 말을 많이 하고,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을 비롯한 핵심 친박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인물’이 됐지만 마음마저 멀어진 건 아닌 셈이다.
박 대통령과 유 원내대표의 이런 애증 관계가 ‘유승민 대망론’으로 연결된다. 현재 박 대통령의 인기는 TK 지역에서도 예전만 못하다. 노년층과 경북 일부 지역에선 여전히 지지세가 강하지만 대구를 비롯한 도시 유권자들은 상당수가 돌아섰다. 이들이 ‘포스트 박근혜’로 꼽는 인물이 유 원내대표다.
TK 지역에선 일단 유 원내대표가 그동안의 친박계 여당 원내사령탑(최경환·이완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도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당과 청와대가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책이나 입법을 통해 박 대통령의 성공에 기여할 것으로 내다본다.
유 원내대표의 지론대로 ‘당이 중심 되는 여권’ 체제를 만들게 되면 박 대통령도 당장은 불편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론 여권 전체의 쇄신을 통해 국정운영을 정상적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 섞인 목소리도 있다.
사실 유 원내대표는 3선 국회의원을 거치는 동안 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현 여의도연구원) 소장, 최고위원, 국회 국방위원장을 역임했지만 ‘변방 정치인’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대구에선 박근혜 대통령 이후의 기대주로 촉망을 받았다. 아버지인 유수호 전 의원을 이은 대구의 2세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러다 이번에 원내사령탑에 오르면서 중앙정치권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특히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체제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며 ‘중앙정치인 유승민’의 위력을 한껏 떨칠 전망이다.
중앙정치인 유승민의 매력
그의 정치적 자산은 ‘탈(脫) 계파’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그를 지지한 84명(전체 투표 의원 149명의 56.4%)의 국회의원들은 친박계 소장파, 친이계, 김무성계 등 당내 각 계파가 골고루 섞여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가 계파에 얽매이지 않고 원내전략을 이끌어 갈 원동력이 되기도 할뿐더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색깔로 차기 대권주자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된다.
다만 유 원내대표가 차기 주자로 각인되기 위해선 시험대를 거쳐야 한다. 그는 당 최고위원으로서 지도부의 멤버로 활동하긴 했지만 아직 진정한 리더십이 검증된 적은 없다. 취임하자마자 ‘증세-복지’ 문제와 ‘인적쇄신’을 놓고 청와대와 충돌하는 등 매끄럽지 못한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여당이 극심한 갈등을 빚는 지금의 여권 상황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원내전략을 짜고 집행하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여권 전체를 이끌어 갈 초당적인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김무성 벤치마킹’이 가능하다. 김무성 대표는 2010년 원내대표를 맡기 전 까지는 존재감이 그다지 없었다. ‘친박계의 좌장’으로 불리다가 세종시 수정 파동 때 친박계에서 사실상 파문당한 이후 고향 부산의 정치인으로 머물렀다. 그러나 원내사령탑에 올라 특유의 통 큰 리더십을 선보이면서 지금은 여권의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 위치에 올랐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유 원내대표의 독특한 캐릭터와 지금 여권에서 김 대표 정도를 제외하곤 특별한 차기 대권주자가 없는 상황을 감안하면 그에게도 차기 대권주자로 우뚝 설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 원내대표에겐 믿음직한 원군이 정치권에 있다. TK 국회의원들이다. 대구·경북의 국회의원 27명은 모두 새누리당 소속이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친박계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TK 의원들은 2월 2일 경선에서 거의 모두가 유 원내대표를 찍은 것으로 전해진다. ‘박심(朴心)이 이주영 의원에게 쏠렸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새해 첫날 유 원내대표가 마련한 대구 국회의원 저녁 모임엔 해외 출장 중인 의원 등 2명을 빼고 10명이 참석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당내에 ‘유승민 계’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돌았다.
TK 국회의원들은 “우리 지역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을 탄생시켰다. 최근에도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산실이었는데, 차기 대권 주자군 가운데 TK 출신이 한 명도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얘기를 자주 나눈다. 그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유 원내대표를 ‘포스트 박근혜’로 띄우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물론, TK 의원들의 지원만으로 ‘유승민 대망론’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그가 ‘김무성 대항마’로 자리 잡기 위해선 친박계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친박계는 지리멸렬한 상태지만 내년 총선에서 ‘공천 학살’을 피하기 위해 언제든 똘똘 뭉칠 수 있다. 지금은 구심점이 없을 뿐이다.
유 원내대표에겐 이런 여권의 역학구도 역시 호재가 된다. 가장 긍정적인 신호는 친박계의 좌장 역할을 하는 서청원 최고위원이 그에게 우호적이란 사실이다. 유 원내대표는 TK 의원들을 규합해 지난해 7·14 전당대회에서 김무성 대표와 맞붙은 서 최고위원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다. 유 원내대표는 서 최고위원이 두 차례 수감 중일 때 정치인 중에서 가장 자주 면회를 가기도 했다.
특히 이번 경선에선 청와대의 핵심 참모 일부도 유 원내대표를 측면 지원했다고 한다. 현재 청와대에 포진한 참모진 중엔 정치권에 있을 때 유 원내대표와 가까웠던 인물이 일부 있다. 청와대의 유승민 인맥은 상황에 따라 그를 ‘포스트 박근혜’로 만드는 데 첨병 역할을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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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성 언론인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