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경력 59년차, 현장선 여전히 젊은 피”

“빌딩이 높을수록 그림자는 길어진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수사반장’ 마지막회에서 은퇴를 결심한 박 반장(최불암 분)이 남긴 한마디는 희대의 명대사다. 70~80년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이 강력 범죄로 두드러지던 시대상을 꼬집은 말이었다. 그 후 20년. 세상은 더 좋아졌지만 살인과 강간, 강도사건이 뉴스지면을 빼곡히 채우는 건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늘었다. 끔찍한 범죄에 맞서는 수많은 ‘박 반장’들이 진화하는 강력범죄에 맞서 싸울 때 그들 곁을 든든히 지켜준 노 수사관이 있다. 드라마 ‘수사반장’ 속 박 반장의 실제 모델이자 59년 째 ‘포도왕’의 명성을 지키고 있는 최중락(81) 전 총경이다. 희대의 살인극으로 기록된 ‘샛별룸살롱 살인사건’ 해결의 주역이자 대도(大盜) 조세형을 감화시킨 최 전 총경. <일요서울>이 뽑은 ‘대한민국 명수사관’ 시리즈의 첫 번째 인물이다.
“무슨 일로 이 늙은 수사관을 찾아오셨습니까.”
서울 순화동 삼성 에스원 본사 15층. 출입자 검색 과정을 거친 뒤 사무실로 들어서자 머리가 벗겨진 노신사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기자를 맞는다. 국내 굴지의 보안업체 고문(顧問) 직함이 찍힌 명함을 건네는 그가 바로 ‘영원한 수사반장’ 최중락 전 총경이다.
한국 수사계 ‘살아있는 전설’
이웃 할아버지 같은 서글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스스로를 ‘노(老)수사관’이라고 칭하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59년째 몸에 베인 형사 특유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듯 했다.
대한민국 강력수사계에서 ‘최중락’이라는 이름은 특별하다. 1950년 친형과 함께 경찰에 투신한 그는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계 근무를 시작으로 서울시경 강력계장, 인천시경 수사과장, 서울시경 형사과장을 거치며 40년 동안 베테랑 수사경찰로 명성을 날렸다.
“범인 잡는 게 천직”이라는 그는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매일 같이 범죄 현장을 누빈다. 사건과 맞서는 명수사관의 심장은 여전히 뜨겁게 뛰고 있는 까닭이다.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경찰청 형사당직실로 출근해. 그럼 또 하루가 시작되는 거지. 밤사이에 터진 사건사고들을 쭉 훑어보면서 수사의 ‘감’을 잡는 겁니다. 사건 개요만 보면 어느 정도 느낌이 와. 그 직감을 후배들한테 귀띔해 주는 게 ‘수사연구관’의 임무지요.”
최 전 총경의 경찰청 출입은 왕년의 향수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경찰청 예우에 따라 임명된 ‘수사연구관’ 신분이다. 퇴직한 수사경찰이 맡을 수 있는 수사연구관은 경찰 내부에서 일종의 자문역을 담당한다.
“남들은 노인네 고생시킨다고 할지 몰라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돈이 무슨 필요 있습니까.”
1950년대~1990년대 초까지 수도권 지역에서 벌어진 강력 사건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 최 전 총경이 현역 시절 잡아들인 범죄자만 1300여명, 직접 검안한 시신도 2600여구에 달한다.
59년 필동 일가족 몰살사건부터 66년 상업은행 강도사건, 76년 육일사전당포 살인사건, 84년 을지병원 독살사건 등 굵직굵직한 강력사건의 해결사로 맹활약하던 그는 정년을 9개월 앞둔 1990년 구로동 ‘샛별룸살롱 살인사건’을 진두지휘하며 절정의 수사 감각을 뽐냈다.
최 전 총경의 화려한 경력은 100여개에 달하는 훈장과 포장, 최고의 검거실적을 올린 형사에게만 주어지는 ‘포도왕’이라는 지칭이 말해준다.
“수사반장 촬영 때 진짜 경찰 병력 동원”
‘형사 최중락’을 유명인 반열에 올려준 것은 드라마 ‘수사반장’이다. 꼭 20년 전에 ‘수사반장’은 막을 내렸지만 드라마 관계자들과 ‘반장네 식구들’이라는 모임을 조직해 3개월에 한번씩 만난다는 그는 ‘식구들’ 명단과 연락처가 빼곡히 적힌 손때 묻은 서류뭉치를 꺼내 보였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대작의 주인공이었다는 자부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70년대 내가 서울 경찰서 ‘330 수사대’ 근무할 때였지.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경제가 좋아지면서 강력범죄가 한창 판치던 시기였습니다. 박 대통령이 직접 언론사에 지시를 내렸죠. ‘나쁜 짓 하면 반드시 벌 받는다는 내용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라’고.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게 바로 ‘수사반장’이었어요.”
그러나 한국 최초의 수사물을 만드는 과정은 험난했다. 수사극을 만들어본 연출가도, 대본을 써본 작가도 없었던 것. 결국 방송사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고 가장 많은 검거실적을 올린 최중락 형사가 직접 드라마 제작에 뛰어들었다.
“무조건 실제처럼 하라고 했어요. 내가 경찰대학 입교할 때 감독부터 스태프까지 모두 데리고 들어가 실제 경찰 훈련을 시켰죠. 작가들은 아예 경찰서 유치장에서 재우고 살인사건 현장에 끌고 다니며 체험하게 했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전부 경찰이 실제 해결한 사건들이죠.”
드라마는 철저히 당시 최중락 형사가 소속된 서울경찰서 ‘330수사대’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배우 캐스팅부터 현장 지휘까지 최 전 총경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박 반장역의 최불암 씨부터 김상순, 조경환, 남성훈 씨 모두 우리 대원들의 이미지와 가장 닮은 사람을 뽑은 겁니다. ‘수사반장’ 속 경찰들은 실제 경찰의 모습을 쏙 빼다 박은 셈이죠.”
‘수사반장’의 인기가 수직상승하자 촬영도중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줄을 이었다. 서울 동대문에서 박 반장 팀의 잠복·추격 장면을 찍을 때였다. ‘수사반장’ 속 형사들을 본 한 무리의 일당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최 전 총경은 격투 끝에 이들을 붙잡았다. 알고 보니 이들은 동대문을 무대로 활동하는 전문 소매치기였다.
“드라마가 실감나다보니 최불암 씨에게 전화를 걸어 자수하는 범죄자들도 생겼어요. 나중에는 아예 촬영장 근처에 경찰 인력을 배치하고 드라마를 찍었죠.”
“상대 잘 못 골랐다. 사흘 안에 갖고 와”
현역 시절, 서울 시내 전과자들은 거의 모두 최중락 전 총경의 ‘동생’이었다. 수많은 범죄자들을 검거해 교도소에 보냈지만 특유의 인간미로 남겨진 가족들 뒷바라지를 도맡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죗값을 치른 전과자들은 출소 뒤 최 전 총경을 ‘형님’으로 모셨다. 이런 베테랑 형사의 ‘인맥’을 활용한 일화도 재미있다.
“71년 3월로 기억합니다. 친구이기도 한 방송인 송해 씨가 날 찾아왔더군요. 부인이 퇴계로에서 명품 손목시계를 소매치기 당했다는 겁니다. 귀한 물건이라 꼭 찾아야 하는데 방법이 없으니 나한테 온거죠.”
친구의 부탁에 최 전 총경은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곧장 서울 시내의 소매치기 전과자들을 불러 모은 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수일 전 퇴계로에서 여성용 손목시계 훔쳐간 녀석 당장 제자리에 갖다 놔라. 너희들이 먹을 게 아냐.”
그 뒤 꼭 사흘 만에 최 전 총경 앞으로 두꺼운 사전 한권이 배달됐다. 표지를 열자 칼로 도려낸 책 속에 잃어버린 명품시계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전과자들 사이에도 엄연히 의리가 있고 룰이 있습니다. 수사관이 진심으로 대해주면 그들도 마음을 열고 도움을 주는 거죠.”
물론 모든 범죄자들이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5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샛별룸살롱 사건’의 범인 김태화는 사형대에 서기 직전까지 “지옥에서 두고 보겠다”며 이를 갈았고 최 전 총경 때문에 감옥신세를 진 잡다한 범죄자들이 ‘복수 하겠다’며 협박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최 전 총경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79년 서울청 폭력계장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조직폭력배를 소탕해 감옥에 보냈는데 그 조직원 중 하나와 동거하던 여성의 사정이 딱하더군요. 집창촌에 몸담고 있는 여인이었는데 업주며 손님들이 괴롭히지 못하게 뒤를 좀 봐줬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오해를 샀죠. ‘최중락이 범죄자의 여자를 빼앗았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소문이 감옥까지 흘러들어가 그 조직원이 나를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더군요.”
문제의 조직원은 먼저 출소하는 부하들을 시켜 ‘최 형사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거사 하루 전 지시를 받은 인물 중 한 명이 최 전 총경을 찾아왔다. ‘XX가 형님을 죽이려고 하니 몸조심해시라’며 미리 귀띔해준 것.
최 전 총경은 피하지 않았다. 다음날 출근길 동대문 로터리를 지날 때였다. 집에서부터 뒤를 밟는 검은 승용차의 존재를 눈치 챈 그는 먼저 차를 세우고 운전사를 피신시켰다. 그리고 자신을 덮치러 온 괴한들 앞에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워낙 사람이 많은 대로변이었던지라 괴한들도 섣불리 최 전 총경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오해를 풀었지요. 나중에 감옥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그 친구도 출소한 뒤 나를 찾아왔습니다. ‘몰라 뵈어 죄송했다’며 무릎 꿇고 빌더군요. 그렇게 동생이 또 하나 생겼지요.”
“대도 조세형, 하루용돈 1만5000원”
최 전 총경의 공식적인 직함은 삼성 에스원 상근고문이다. 에스원에는 현역시절 방범 강의를 했던 인연으로 퇴직 직후 스카우트 돼 입사했다. 평생 수사관으로 살아온 그가 도둑 막는 회사에 취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대문서 재직시절 절도범과 형사로 만난 뒤 지금껏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대도’ 조세형씨를 에스원에 소개한 것도 그였다. 조씨는 최 전 총경 밑에서 방범 컨설팅을 도왔었다. 그러나 지난 2005년 조씨는 또 다시 남의 집 담을 넘다 본사 직원에게 잡혀 구속된 뒤 조씨는 최근까지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최 전 총경은 오랜만에 조씨의 근황을 전하기도 했다.
“가중처벌 때문에 꽤 오래 감옥에 갇혔다 얼마 전에 출소했죠. 엊그저께도 절 찾아왔더군요. 사람들은 조세형이 도벽을 이기지 못해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고 하지만 속사정은 따로 있습니다. 듣자니 부인에게 하루 용돈 1만5000원씩을 타서 썼는데 찾아오는 감방 동기며 후배들이 많다보니 밥이라도 한 끼 사 먹이고 싶은 마음에 죄를 저지른 거죠. 이제 그 친구도 많이 늙어서 몸놀림이 예전 같지 않더군요.”
최 전 총경에 따르면 칠순을 넘긴 조씨는 초등학교 5학년짜리 늦둥이 아들 키우는 맛에 푹 빠져있다. 유난히 머리가 좋은 조씨의 아들은 반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의 수재라고 한다.
“조세형에 대해 사람들이 대도니 전과자니 해도 다 옛날 얘기죠. 지금은 착실하게 마음을 잡고 평범한 가장으로 살고 있습니다.”
경찰경력 40년 10개월. 팔순을 넘긴 노수사관의 사건 수첩엔 흥미로운 이야기가 한 가득이었다. 그는 자신이 쌓은 농후한 경험과 지혜를 후배 형사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기로 유명하다.
“강력계 형사, 아무나 못하는 직업이죠. 힘들고 고되고 대우도 나쁘고. 그만큼 사명감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임무를 사랑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세계지요.”
최 전 총경이 허리춤에 찬 만보기는 오후를 갓 넘긴 시간이지만 벌써 4000이 넘는 숫자가 찍혀있었다. 여든의 노 수사관은 매일 쉼 없이 현장을 누비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샛별룸살롱 살인사건은?
1990년 1월 28일 서울 구로동 샛별룸살롱에서 여종업원 2명과 이들의 남자친구 등 10대 남녀 4명이 흉기로 처참하게 살해된 사건. 범인인 조경수(당시 24세)와 김태화(당시 22세)는 전남 나주를 연고로 한 고향 선후배 사이였다. 이들은 특수절도혐의로 3년간 복역한 후 출소한 직후인 1990년 1월 4일 전남지역 술집에서 여종업원(당시 26세)과 술을 마시던 중 종업원이 자신들을 무시한다며 흉기를 휘둘러 살해하고 말리던 여주인에게마저 중상을 입힌 뒤 달아났다.
서울 구로동 ‘벌집촌’으로 숨어든 일당은 1월 28일 인근 샛별룸살롱에서 4만8000원어치 술을 마신 뒤 여종업원들이 2차를 거절하자 욱하는 마음에 행패를 부리다 쫓겨났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일당은 같은 날 새벽 1시 경 룸살롱을 급습해 여종업원(당시 15세, 18세)과 웨이터(당시 16세), 인근 당구장 종업원(당시 16세) 등 10대 남녀 4명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이들은 1심과 2심 그리고 항소심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1992년 겨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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