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요할 땐 다급하게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팽>
이명박 회고록을 검증할 소설
[일요서울 | 박찬호 기자] 80년대 후반 그는 어떤 소설 때문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일이 있었다. 실천문학사가 펴낸 백시종의 <돈황제(皇帝)>라는 소설이었다. 누가 읽어도 현대그룹과 정주영 회장을 연상케 하는 이 소설은 한 재벌기업 회장의 불법과 비리에 의한 부정축재, 지금은 죽고 없으나 그 아들들에 의해 현대그룹이 날로 노동자의 고혈을 짜내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의 왕국을 묘사한 소설, 권력·언론과의 유착, 여자관계 따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
특히 이 소설은 주인공인 ‘왕 회장’과 문인들의 잦은 만남조차 ‘아부’ ‘용돈’ ‘공짜여행’ ‘쓰레기’ 따위의 구체적인 표현을 써 가며 양쪽 모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소설을 쓴 백시종이 10년간 현대그룹의 직원으로 재직했다는 점이었다.
책에서 작가 자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백시종은 ‘80년 현대그룹 종합기획실에 입사해 10년 동안 사보 제작을 담당하다가 89년 4월 그룹 통합홍보실 부장으로 승진발령을 받았으나 사흘 만에 부당 해고당했다’고 되어 있었다. 왜 부장으로 승진하자마자 해고됐는지, 왜 백시종이 그런 소설을 쓰게 됐는지 어느 쪽도 밝힌 바 없으므로 베일에 가려지고 말았지만 얼마 후 책이 자취를 감추면서 뒷말만 무성하게 남았다.
<돈황제> 이후의 그의 행적에 대해서 다음 주 발행하는 <팽>이라는 소설을 통해 보다 자세하게 나올 예정 이어서 우리 사회와 문단에 화제가 되고 있다.
▲ 먼저 <돈황제>의 집필 중 탄압사례에 대해
1989년 봄, 1천2백 장짜리 <돈황제>를 4번에 분재하기로 했던 모 여성잡지는 다음호에 2회분을 게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잡지에 싣지 않고도 전체 원고료를 지불하기로 했으니, 작가에 대한 회사의 배려가 그보다 더 클 수 없다고 한껏 생색을 내 마지않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내 소설 연재를 중단하는 대가로 3억 원을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는 루머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시인 고정희의 소개로 실천문학에서 책이 나오자 대형서점에 배포되는 통로는 물론, 주요 일간지에의 광고 및 기사게재가 철저히 봉쇄됐습니다. 유일하게 책 광고를 받아주었던 모 일간지도 결국 돌아섰는데 현대그룹의 광고를 얻지 못하던 그 신문에 이후 현대의 광고가 게재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황제>가 10만부 이상 팔렸습니다.
만약 그 때 신문광고가 자유롭게 게재되고, 서점이 제대로 책을 취급해 주었더라면 적어도 50만 부는 넉넉히 판매되고 남았을 분위기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독자들의 주문이 쇄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책 이제 팔지 않습니다’ 하고 돌려세운 그 뻔뻔한 해프닝이라니요…….
법률상 판매가 금지된 책도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책도 아닌, 그냥 소설책을 독자가 읽을 수 없게시리 서점 자체에서 봉쇄시킨 개 같은 케이스가 언제 또 있었던가요. 그 역시 <돈황제>를 취급하지 않는 대가로 서점마다 엄청난 뒷돈이 제공되었다는 후문입니다.
▲ 이번에 나오는 <팽>이라는 소설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거대 기업의 황포에 대해, 소설을 통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돈황제 이후의 내용입니다. 요즈음 우리사회가 갑의 횡포가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산업화 이후의 오래 동안 있어 왔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현대그룹은 갑 질의 황포는 지금보다 더 심했습니다. 사주인 정주영과 이명박의 갈등, 인권, 기업의 오너들의 필요하면 끌어들이고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근로자를 향한 기업의 횡포를 보면서 이 내용을 소설로 형상화 해 고발한 내용입니다.
정주영과 이명박의 갈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명박의 을이었는데 세월이 지나니 이명박이 갑이고 정주영이 을로 변하는 과정. 근로자들을 향한 기업의 갑 질에 대해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집필 했습니다. 최근에 나온 이명박의 회고록과 비교해 읽으면 보다 우리 사회를 균형 있게 볼 수 있습니다.
▲ 앞으로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계신지요?
-지금까지는 내 정체성을 찾는 일,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말하자면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에 가야할 방향을 추적하고 형상화하는 작품을 써왔습니다. 현재는 나의 성장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보통 작가들이 자기 이야기부터 시작하는데 나는 늘 남 얘기를 했어요. 그동안 연마했으니 이제 최초로 내 얘기를 쓰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 세대는 성장 과정에서 가난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경험했기에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어요. 여러 갈래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해온 거대 권력에 맞서서 싸우는 소시민의 삶에 대해서는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을 보면 의식의 흐름이나 분위기, 문체에 무게를 많이 두는 것 같습니다. 나의 경우는 처음부터 줄곧 소설은 이야기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사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업들이었지요. 앞으로도 그 부분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 젊은 시절의 투지와 열정이 약해지고 문장도 드라이해지는 것을 느끼지만 경륜으로 그런 것들을 뛰어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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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기자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