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격자·뚜렷한 CCTV없어 수사 난항… 네티즌 활약
“도와주세요” 포털사이트 글 올리자 경찰 재수사 나서
“좋아하는 케이크 대신 크림빵을 샀어. 미안해”
아내 A(26)씨에게 남편 강모(29)씨가 건넨 마지막 말이다. 강 씨는 지난 10일 새벽 1시 30분께 충북 청주시 흥덕구 아일공업사 인근 도로에서 귀가하던 중 뺑소니사고로 숨졌다.
강 씨는 사범대를 수석 졸업했지만 넉넉하지 못한 경제 사정 때문에 트럭 운전을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0월 아내 A씨와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이뤘다. 비록 형편은 어려웠지만 두 사람은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행복한 신혼생활을 즐겼다. 그리고 아내는 임신을 했다.
사고 당일 강 씨는 임신 7개월인 아내를 위해 크림빵을 잔뜩 사들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강 씨는 A씨에게 전화를 걸어 “좋아하는 케이크 대신 크림빵을 샀는데 미안하다”며 “가진 것이 없어도 우리 아기에게 만큼은 열심히 사는 훌륭한 부모가 되자”고 말했다. 그리고 10분 뒤 뺑소니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범인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발생한 사고인 탓에 목격자를 찾을 수 없었고, 사건 현장 CCTV로도 뚜렷한 단서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강 씨의 지인은 “빨리 가해 차량이 검거되길 바란다”며 언론에 제보했다.
경찰 추적 BMW ‘억울’
초동수사 문제 있었다
이런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자 자동차 동호회 웹사이트를 중심으로 ‘네티즌 수사대’가 나섰다. 경찰이 추적하는 유력한 용의차량인 흰색 BMW 승용차를 위주로 CCTV화면을 분석한 것이다. 이들은 후미등 광원의 폭, 차체 윤곽, 사이드 미러 모양, 차문 손잡이 등을 가지고 CCTV에 잡힌 흰색 세단의 용의차량을 BMW 5시리즈로 압축했다. 또 CCTV 영상을 확대해 번호판 숫자를 ‘XX하 19XX’나 ‘XX하 17XX’같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그때 어떤 네티즌이 유명 포털사이트 기사에 ‘우리도 도로변을 촬영하는 CCTV가 있다’고 댓글을 달았다. 이 네티즌은 청주시 차량등록사업소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차량등록사업소는 건물 내외곽과 주차장에 CCTV를 설치하고 24시간 가동하고 있었다. 이 댓글을 본 경찰은 차량등록사업소를 방문해 관련 CCTV화면을 분석했으며 지난 27일 용의 차량이 BMW가 아닌 원스텀임을 알아냈다. 사건 발생 17일 만에 용의차량을 특정지은 것이다. 결국 언론 보도를 본 범인 허모씨의 아내가 지난 29일 경찰에 “남편이 범인인 것 같다”고 신고했으며 같은 날 오후 11시 허 씨가 직접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네티즌 수사대’가 없었다면 영구 미제로 남을 뻔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애당초 경찰은 억울한 BMW를 용의 차량을 쫓고 있었다. 네티즌들의 활약으로 언론 보도가 이어지지 않았다면 차량등록사업소에 근무하는 공무원의 댓글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자수 신고전화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의 범인 검거는 ‘네티즌 수사대’의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건 수사하기 힘들어”
피해자 가족이 직접 나서
이처럼 경찰이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피해자 가족이 직접 나서거나, 또는 여론(네티즌)에 호소해 경찰이 수사에 나서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10월 B씨는 큰 아들 유치원 운동회에서 탈골되는 사고를 당했다. 달리기 대회에서 B씨의 뒤에서 달리던 다른 아빠가 B씨를 밀치면서 당한 사고였다. 병원으로 옮겨진 B씨는 5시간동안 수술을 받았으며 3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목발에 의지한 채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B씨는 자신을 밀친 가해자가 누군지 알지 못해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이에 B씨의 아내가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뭘 찾으라는 거냐. 나는 못 찾으니 유치원 가서 증인과 증거를 찾아와라”고 말했다. 결국 B씨의 아내는 직접 수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운동회 장소에 설치된 CCTV 화면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녔으며, 유치원 부모들에게 연락을 하고, 교육청을 찾아가는 등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증인은 물론이고 증거 또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B씨 가족이 언론에 이 사건을 제보하고 나서야 경찰은 “수사 진행이 늦어진 것뿐이지 직접 증거를 찾아오라고 한 적 없다”며 “운동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 중 가해자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부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해”라고 해명했다.
지난해 친오빠에게 성폭행 당한 C씨는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도와달라’는 글을 올린 끝에 오빠를 처벌할 수 있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3차례에 걸쳐 친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C씨는 2012년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하지만 경찰은 가해자를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이에 C씨는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자신의 상황을 자세히 적은 글을 게재했다. C씨의 피해 사실과 경찰의 태도를 본 네티즌들은 분노했다. 이런 반응에 경찰은 재수사에 착수했고 결국 검찰은 보강수사를 거쳐 가해자를 기소했다.
그런가 하면 2011년에는 피해자의 어머니가 포털사이트에 “대학생 딸을 성폭행하려다 폭행으로 살해한 남자 2명에게 폭행죄만 인정됐다”며 “경찰은 사고현장 CCTV도 확보하지 않은 채 유족의 재수사 요구를 묵살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강간치사 혐의로 고소했지만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항고, 재정신청도 모두 기각됐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네티즌들의 재수사 요구 목소리가 높아지자 결국 경찰은 “재수사하기로 결정했다. 엄정한 수사로 사건에 대한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피해자들의 경찰 수사의 부당함을 인터넷에 호소하면 여론이 경찰을 움직이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피해자 가족과 이를 지켜보는 네티즌들은 “경찰이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어느 피해자 가족은 “경찰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 어디에 신고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또 글에서 “경찰을 찾는 사람들은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라면서 “경찰마저 우리에게 피해를 주면 인터넷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