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경복궁 복원하고 총독부 철거하고…
[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경복궁 복원하고 총독부 철거하고…
  • 조아라 기자
  • 입력 2015-02-02 10:37
  • 승인 2015.02.02 10:37
  • 호수 1083
  • 6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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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박물관에 떠넘겨진 철거 문제

1989년쯤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기였다. 주한 외국대사들과 근정전에서 무슨 연회를 마치고 나왔다. 근정전 앞뜰에서 전망하니 총독부 건물만 보이고 남쪽 광화문과 서울시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외국 대사들이 대통령에게 “이렇게 유서 깊은 궁궐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저 건물을 아직도 귀국 정부는 그대로 두고 보고만 있습니까”라고 했다. 그때 노 전 대통령은 부끄럽고 참담하게 생각해 저 건물을 철거하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때 대통령이 비서관에게 “국립중앙박물관을 이전하고 총독부 건물 철거를 논의해보라”고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300억 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총독부건물을 개수해 박물관이 되고,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때였다. 
 
당시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 청와대에 불려가서 비서관을 만나 “하루 속히 박물관을 다른 데로 이전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관장은 물론 박물관 직원 모두가 망연자실해 앞이 캄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십만 점의 문화재와 전시실 운영, 조사연구, 선전, 교육행정 등을 담당하는 인원들이 불시에 어디로 가라는 것인지. 관장 이하 직원 모두는 청와대의 지시를 어길 도리가 없었다. 전전긍긍하며 혹 임시라도 이전할 건물이 없는가 하고 별 궁리를 다 해보았지만 묘수는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자 그 얘기는 그대로 흐지부지됐다. 
 
그때 우리 생각이 모자랐던 것 같다. 아무리 청와대의 지시라 하더라도 벌벌 떨지만 말고 “박물관을 옮기려면 적어도 몇 년이 걸리고 막대한 예산이 소요됩니다”며 “저희가 계획을 세워 보고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으면 될 터인데 그냥 전전긍긍하고만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암울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가 시작됐다. 대통령 취임 후 각 부처별 업무보고가 청와대에서 있었다. 1993년 3월20일 쯤엔 문화체육부의 업무보고가 있었다. 이민섭 당시 장관을 필두로 본부 간부직원과 예하 기관의 기관장이 모두 참석했다. 
 
보고가 끝나고 대통령의 질의와 답변이 있은 후 대통령은 몇 가지 중요사항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얘기했다. 또 이를 「국책사업」으로 시행 할 것을 지시했다. 그중에 대통령이 큰 의지를 가지고, 강조 지시한 사항은 바로 총독부 철거 문제였다. 김 전 대통령은 “일제 잔재인 총독부 건물을 더 이상 두고 보면 안 될 것”이라 했다. 
 
지금 이 시대는 각국 간 화해와 협력으로 세계가 발전해야 할 시점이다. 한일관계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기 위해서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두면 역사적 교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저 건물을 보면서 일제침략 식민시대의 원한에 찬 시각으로 일본을 바라볼 것인가. 그 건물을 없애서 경복궁을 복원해 또 다른 면에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한일 시대를 열어 나가자는 게 요지였다. 
 
중요한 것은 철거를 하되 「국책사업」으로 시행하라는 지시였다. 이 지시는 흐지부지 끝날 사항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강한 소신과 의지가 담겨 있는 지시였다. 그때부터 문화체육부에서는 철거를 어느 부서와 기관이 담당할 것이냐에 대해 의견을 수렴하게 됐다.
 
당시 박태권 차관의 주재하에 본부 실국장과 박물관장, 문화재관리국장 등이 참여해 두어 번 회의를 했다. 이에 앞서는 문화재관리국 주관으로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막대한 예산을 들인 경복궁 복원사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당시 박물관장으로서 “박물관은 유물수집, 전시, 조사연구, 교육 중심의 문화기관”이라며 “총독부 철거와 같은 방대한 사업을 치를 행정적 능력이 없음”을 역설했다. 또한 “문화재 관리국에서 총독부 건물을 철거해야만 경복궁 복원 사업이 빛을 보게 된다”며 “문화재 관리국은 조사연구도 있지만 방대하고 능력 있는 행정조직이 있으니까 문화재 관리국에서 담당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랬더니 마지막 회의 때 박차관이 “그러면 여기 모인 실국장과 기관장의 의견을 들어 봅시다”라고 한 사람씩 의견을 물었다. 나는 본부실국장등과 별로 친분이 있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래도 몇 사람은 내 의견에 동참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서로 짜고 하듯 전원이 “박물관에서 현재 그 집을 사용하고 있으니 사용자가 철거하면 그 다음에 문화재 관리국에서 복원사업을 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랬더니 박차관은 “그러면 만장일치로 철거사업은 박물관에서 맡으십시오” 라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청화백자 시명준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높이30.9cm
 
백자의 태토가 눈같이 희고 유약도 아주 약간의 푸르름을 머금어 태토가 더 희게 보이는 키가 낮은 충 항아리이다. 
 
형태는 구부가 낮고 어깨로부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적절히 풍만해진 상동부에 이른다. 그리고 다시 점차 좁아지면서 허리를 지나 굽(바닥)위에서 살짝 잘룩해지다가 다시 퍼지면서 굽(바닥)에 이른다. 
그래서 기형의 굴곡진 선이 부드럽고 유연하다. 이런 부드럽고 유연하게 굴곡진 고운선을 가진 준(항아리)의 형태는 18세기 전반의 특징이다. 그래서아리의 형태(선)만 보아도 그 시대를 알 수가 있다.
 
이 준(항아리)에는 드물게 중국 남조 양나라 심약(441~513)의 시를 청화(코발트)로 썼는데 전면에 공간을 크게 크게 살려 띄엄띄엄 썼고 글씨도 간결하게 잘 썼다. 눈같이 흰 백자에 간결하게 쓴 푸른 시명이 이 항아리의 품격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것 같다.
 
오언절구 사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일평생 중 젊은 날에는 이별을 해도 앞날을 기약하기 쉬웠는데 그대와 함께 늙어 저무는 시기에는 헤어지면 다시 기약할 수 없네. 한 동이 술이라고 말하지 마라. 내일 다시 손에 쥐기 어려워라 꿈속에서라도 길을 찾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서로의 그리움을 위로할까.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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