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유라시아 이니셔티브 함께 추진
일부선 “중국 지지 없는 정상외교 펼치기 어려울 것”
[일요서울 | 김재현 프리랜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오는 5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우리 정부의 움직임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러시아 외무장관은 지난 21일(현지시간) 북한이 행사 참석과 관련해 긍정적인 첫 번째 신호를 보내왔다고 거듭 밝혀 중국 일본 등 주변국 뿐만 아니라 미국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날 모스크바 시내 외무부 청사에서 열린 연두 기자회견에서 ‘러시아가 보낸 2차대전 승전 기념행사 초청장에 어떤 나라들이 답했는가’라는 질문에 “약 20개 국가가 참석을 확인했다”면서 “그 중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들어 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행사에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가운데 사상 첫 해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행사 개최국인 러시아가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이미 초청장을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박 대통령의 행사 참석 여부에 대해 지난 22일 민경욱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결정된 바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에 아직은 가타부타 회담 가능성을 예단하기에는 이르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우선 가장 크게 외교적으로 고려돼야 할 변수는 미국의 입장이라는 것이 외교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하지만 청와대는 실추된 지지율과 야권의 압박 등 정국돌파를 위해 획기적인 반전 이벤트가 절실한 상황이어서 남북정상회담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무성하다.
라브로프는 ‘초청장을 받은 북한 김 제1위원장은 참석을 확인했는가’란 거듭된 질문에 “첫 번째 신호 형식의 긍정적 답이 왔다”고 말했다.
유리 우샤코프 러시아 대통령 외교담당 보좌관(외교수석)은 지난달 “60주년 승전 기념행사 때와 마찬가지로 2차대전 당시 모든 반(反)히틀러 연합국은 물론이고 가까운 동맹국들과 파트너 국가들, 브릭스(BRICS) 국가들을 포함한 크고 영향력 있는 국가 정상들이 모두 초청됐다”고 밝힌 바 있다.
이때 우샤코프는 “북한 지도자(김정은 제1위원장)에게도 초청장을 보낸 사실을 확인한다”면서 “그가 모스크바를 방문해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평양으로부터의 일차적 신호가 있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일각에서는 김 제1위원장이 실제로 모스크바 방문에 관한 최종 답변을 주는 것은 행사가 임박한 시점이 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이날 러시아 타스 통신은 라브로프 장관의 발언을 확대 해석해 “김 제1위원장이 러시아 측의 승전 기념행사 초청을 수락했다”고 보도했고 같은 내용이 국내에 그대로 전해졌으나 이는 장관의 실제 발언 내용과는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매년 5월 9일 나치 독일을 무찌르고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날을 기념하고 있다. 10년 단위의 '꺾어지는 해'처럼 주요 연도 기념식에는 여러 외국 정상들이 초청된다.
김정은 위원장 크로스 행보
올해 70주년 기념행사엔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와 서방 간 심각한 갈등이 지속되면서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서방 주요국가 지도자들의 러시아 방문 가능성은 현재로선 희박한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가능성이 가시화됨에 따라 김 위원장이 ‘정상외교’에 나설지에 우리 정부를 비롯해 미국 중국 일본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가능성은 지난해 11월 김 제1비서의 최측근인 최룡해 당 비서가 특사 자격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며 처음 제기됐다.
이후 김 위원장의 방러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된 바 있으나 러시아 당국을 통해 공식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감지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국제적 관심을 끌고 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의 김 위원장의 초청은 북-러 쌍방이 최근 적극적인 관계 설정에 나서는 와중에 나온 것이어서 성사 가능성이 높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특히 미국이 북한을 강도 높게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 역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의 압력을 받고 있는 러시아가 손을 맞잡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게 외교 전문가들의 견해다. 북한이 러시아와 밀착모드로 움직일 경우 미국 정부에 상당한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외교를 통한 북한의 노림수는 외교적 고립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김 위원장의 집권 이후 북한은 맹방인 중국과 줄곧 냉각기를 걸으면서 심각한 고립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인권 및 영화 ‘인터뷰’로 불거진 해킹 사태 등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대미 관계가 엉켜 이로 인해 국제사회의 고립을 샀다. 하지만 북러외교는 이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전망이다.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사업의 폭을 넓히면서 필요한 지원을 폭넓게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점도 이득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외교적 입지가 좁아진 러시아는 동북아의 ‘뜨거운 감자’인 북한을 먼저 껴안으며 북핵 6자회담 등에 대한 역할을 강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노린 듯 러시아는 이번 승전 행사에 김 위원장을 비롯해 박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 각국 정상들을 모두 초청했다.
또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이 성사될 경우 북한 최고지도자가 사상 처음으로 다자외교 무대에 나선다는 점에서 파급력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초청에 응하는 것만으로도 북한의 입장에선 대외적으로 김 위원장의 다자 정상외교전 돌입을 공식 선포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이럴 경우 향후 김 위원장이 직접 움직이는 정상외교의 폭이 광폭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돼 우리를 포함한 주변국에 만만찮은 부담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지금까지 대중국 의존도가 놓았으나 김 위원장이 집권하면서부터 이 틀이 깨졌다. 즉 김 위원장은 유학생활을 통해 배운 국제관계학을 활용, 광폭외교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추측도 무성하다.
북-중 관계 핵심 변수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집권 후 중국보다 앞서 러시아와 정상회담을 연 것은 전례가 없다는 점도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 중 하나다. 북한이 러시아와 관계를 구축할 경우 북한은 사실상 처음으로 중국이 배제된 독자적 외교노선을 걷게 된다. 아무리 관계가 냉각됐다해도 여전히 북한의 가장 큰 동맹은 중국이기 때문에 이 점이 북한에 상당한 부담을 줄 수도 있다.
2013년 3월 제3차 핵실험을 계기로 소원해진 북-중 관계는 지난해 양국 간 인적교류 및 원유지원 등에 이상이 감지되면서 더욱 부각됐다.
2013년 최룡해 당시 군총정치국장의 방중 당시 시진핑 주석이 무표정한 얼굴로 최룡해가 전달한 김 위원장의 친서를 한 손으로 받아 그 자리에서 읽지도 않았던 모습은 북-중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거론된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김 제1비서의 러시아 방문 및 북-러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북중간 관계악화가 더 심화될 것이라는 분석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중국의 지지가 없는 정상외교를 펼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친러 행보가 중국 측의 입장을 바꿀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북한이 러시아와 외교적 협력점을 찾을지 주목되는 가운데 우리 정부의 움직임에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전승절 행사까지 시간이 4개월 정도 남았고, 남북 관계는 그 사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며 “박 대통령과 (김정은의) 만남이나 정상회담을 논의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북한의 움직임을 좀 더 주시한 뒤 미국과 논의해 참석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북한의 참석이 확실시 될 경우 박 대통령이 초청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박 대통령이 남북 관계 개선을 천명했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본다면 초청을 거절할 이유는 많지 않다”며 “박 대통령과 김정은이 모두 참석한다면 대면 접촉이나 간단한 대화는 이뤄질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박대통령 對러 관계 언급
또 김정은이 국제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의 초청에 응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던 만큼 정부도 어느 정도 남북 정상의 조우를 예상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일부에서는 박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에 한국과 러시아 외교 관계가 언급된 배경을 주목하고 있다. 신년 기자회견 이후 북한의 러시아 행사 참석 검토 고민은 공교롭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12일 신년 구상을 밝히는 기자회견에서 “한·러 관계의 안정적 발전을 기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박 대통령이 평화통일의 기본 토대로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같이 밝힌 것이다. 박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 일본 등에 이어 러시아와의 관계를 언급했다.
박 대통령의 러시아에 대한 언급의 경우 단순히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만은 아닌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남북 관계에 있어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전통적인 ‘혈맹‘이었던 중국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 반면에 러시아와는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1일 북한이 각국에서 김 위원장에게 연하장을 보냈다고 보도하면서 예년과 달리 중국을 러시아보다 후순위로 호명했다. 이는 과거 북한이 외국 국가수반이 김정일·김정은에게 연하장을 보냈다는 소식을 전할 때 중국·쿠바·러시아 순으로 호명한 것을 고려했을 때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이에 올해는 러시아와 남북한 사이 교류와 외교전이 모두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 러시아를 사이에 두고 남북 대화와 경제협력 등이 활기를 띨 가능성도 높다. 이는 최근 박 대통령의 발언들에서 드러난다.
박 대통령은 지난 23일 “통일된 한반도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게 될 것이며, 동북아는 물론 유라시아와 세계경제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세계경제포럼(WEF) 제45차 연차총회(일명 다보스포럼)를 계기로 열린 ‘한국의 밤’ 행사에 영어로 영상메시지를 보내 “저는 남북한이 하루 속히 통일을 이뤄 지정학적 갈등의 한반도가 동북아 평화와 성장의 관문으로 변화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또 “지금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이러한 과제를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대한민국은 인내심을 갖고 북한과의 대화·협력을 추진하면서 차근차근 통일을 준비해 나갈 것”이라며 “민간차원의 교류·협력을 강화하고 국제사회와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한반도 통일시대가 머나먼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남-북-러를 잇는 경제협력라인으로 철도연결사업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이에 박 대통령이 러시아를 통해 북한과 여러 경제협력 방안을 타진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또 이 같은 구상에 이어 민간차원의 교류 협력을 언급한 것은 남-북-러 경협 추진을 놓고 기업의 대북사업참여를 추진할 것이라는 분석도 낳고 있다.
ilyo@ilyoseoul.co.kr
김재현 프리랜서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