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장군의 딸이야” 휴대폰 문자에 꿈뻑

90kg에 육박하는 육중한 몸매도 ‘장군의 딸’이라는 간판 앞에서는 오히려 매력덩어리로 비춰진 걸까. 달콤한 문자메시지와 전화 통화로 무려 40여명의 장교들을 농락한 철없는 꽃뱀의 정체가 뒤늦게 탄로났다. 자신을 예비역 장군의 딸이며 간호장교라고 소개한 여인의 정체는 일개 분식점 ‘알바(아르바이트)생’에 불과했다. 대구지방경찰청은 지난 2일 장군의 딸을 사칭하며 수십명의 군 장교에게 접근해 돈을 가로챈 혐의로 양모(27·여)씨에 대한 고소사건을 국방부로부터 이첩 받아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양씨는 여전히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도주 중이다. 양씨의 지인에 따르면 그는 부모가 운영하는 분식집에서 가끔 아르바이트를 할 뿐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더구나 160cm 키에 몸무게가 90kg에 육박할 만큼 ‘육덕진’ 몸매를 지닌 양씨. 이런 양씨에게 수십 명의 젊은 장교들이 수천만원의 거금을 선뜻 건넸다는 사실은 꽤나 흥미롭다. 양씨에게 돈을 보낸 장교 8명 가운데 한 명은 직접 그를 만나 성관계를 가지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 장교들에게는 ‘너무도 가벼웠던’ 양씨의 기막힌 범행 수법을 샅샅이 들여다봤다.
양씨의 마수에 제대로 ‘낚인’ 장교들은 알려진 것만 8명에 이른다. 양씨는 이들과 애인행세를 하며 장교들의 지갑을 제 호주머니처럼 턴 것이다. 국방부에 접수된 고소장에 따르면 양씨는 지난해 5월부터 10월까지 다섯 달 간 남성들로부터 총 2400만원을 가로챘다.
양씨에게 발목을 잡힌 남성들은 모두 육·해·공군 사관학교 출신 20대 젊은 장교들이었다. 양씨들 이들에게 마치 우연인 것처럼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낸 뒤 연락이 오면 특유의 붙임성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양씨의 교태에 넘어간 남성들은 적게는 20만원에서 많게는 1000만원에 이르는 거금을 아낌없이 쥐어줬다.
“김 대위, 이 사람 한번 만나보게”
그러나 양씨에게 돈을 건넨 장교 가운데 양씨를 실제로 만난 것은 김모(27) 중위 단 한명 뿐. 김 중위는 양씨와 실제 잠자리를 갖기도 하는 등 연인이나 다름없는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중위 외에 피해자들은 공교롭게도 양씨와 전화 통화만 했을 뿐 일면식조차 없었다.
양씨는 무슨 수로 낯모르는 젊은 장교들의 지갑을 손쉽게 열 수 있었던 걸까.
남성들이 양씨에게 넘어간 수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장교들의 휴대전화번호를 입수해 “XX대위님 아니냐”며 문자 메시지를 보낸 뒤 답장을 보내 온 장교들에게 속칭 ‘작업’을 걸었다.
주로 이씨나 김씨 등 흔한 성을 붙이다 보니 우연찮게도 성과 계급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상당수였다. 이런 장교들이 양씨에게 답장을 보내왔던 것.
양씨는 “김 대위, 이 사람 한번 만나보게”같은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직속상관이 소개한 여성으로 자신을 포장한 것이다.
양씨는 남성들이 답장을 보내오면 “나도 비슷한 문자를 받았는데 누가 장난치는 것 같다”는 식으로 둘러댄 뒤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았다. 이런 수법으로 양씨가 문자를 보낸 현역 장교는 줄잡아 40여명.
이들의 근무지는 대부분 경기도 파주 인근 전방이었다. 이 가운데 30여명은 사관학교 출신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양씨가 ‘특수한 경로’를 통해 장교들의 연락처가 담긴 명단을 입수해 이를 범죄에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양씨는 연락이 닿은 장교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화려하게 포장했다. 초등학교 교사, 예비역 소장의 딸, 법무고시를 통과한 교도소 교위 등으로 변화무쌍하게 정체를 감춘 양씨. 그는 “교도소에 있어 외출을 못한다”며 “나중에 갚을 테니 돈을 좀 빌려 달라”는 식으로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양씨가 돈을 빌리기 위해 둘러댄 핑계는 조의금, 축의금, 병원비 등이었다.
가로챈 돈 밥값으로 다 날려
특별한 직업없이 백수로 빈둥거리던 양씨가 수천만원에 달하는 ‘공돈’을 어디다 썼을까.
경찰에 따르면 양씨는 값비싼 명품을 구입하는 데 돈을 쓰지는 않았다. 대신 중저가의 옷이나 화장품을 사들이고 대부분의 돈은 커피 등 군것질을 하거나 패밀리 레스토랑 등지에서 식사를 하는 데 썼다.
또 양씨는 장교들을 농락하는 동안 고가의 휴대폰을 사들여 1년 동안 무려 5~6번이나 전화번호를 바꿨다. 한때 부모가 운영하는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벌이를 하던 양씨에게는 그만한 호사도 없었으리라.
경찰은 양씨가 ‘꽃뱀’일 가능성은 없다고 못 박았다. 양씨에게 피해를 입은 장교들 가운데 직접 그를 만난 남성은 단 한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양씨 부모의 분식집에서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던 지인에 따르면 양씨의 체격은 일반 여성을 뛰어넘는 거구였다. 160cm의 키에 90kg에 육박하는 몸무게를 자랑했던 것.
그럼에도 유일하게 양씨와 잠자리를 가진 육사출신 김 중위는 서울에서 그를 만난 뒤 신용카드 3장을 맡기는 등 무려 1000여만원의 거금을 떼인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장교들이 양씨의 접근에 혹해 돈을 빌려줬던 것 같다”며 “어떻게 전화통화만으로 그런 거금을 뜯어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양씨는 현재 경찰의 눈을 피해 도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보이스피싱’의 달인인 양씨가 어딘가에서 새로운 사냥감을 농락하고 있을지 모를 노릇이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