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건 배후설, 저급한 권력싸움 그만둬야
- 청와대 문건파문 ‘갑’은 건재하고 ‘을’만 희생
청와대 행정관은 2급부터 5급까지 실무자들을 지칭한다. 행정관들은 비서관들의 지휘 아래 보고서 작성과 정무 판단, 다른 정부기관과 업무협의 등 각종 실무와 행정 처리를 도맡아 한다. 청와대 행정관의 임명권은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있다. 반면 차관급인 수석비서관이나 1급인 비서관의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다. 임명권을 가진 공직자는 당연히 책임도 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윤회 문건 사건으로 구속된 박관천 전 행정관과 문건 배후설로 면직 처리된 음종환 전 행정관에 대한 실질적 책임은 비서실장에게, 정치적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정윤회 문건 사건이 전반전이라면 문건 배후설은 후반전이다. 우선 전반전을 살펴보자. 정윤회와 박지만은 박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실세다. 우리 사회에서 실세는 곧 ‘갑’이다. 갑들의 갈등으로 시작된 문건 사건으로 영하 10도의 혹한 와중에 경찰 초급 간부인 최 경위는 자살하고 박 전 행정관은 구속됐다. 최 경위와 박 전 행정관은 경찰 초급 간부로 을 중의 을이다. 가장 무거운, 그리고 실질적 책임이 있는 비서실장은 오랜 침묵 끝에 유감 표명 한마디로 가뿐히 책임에서 벗어났다. 정치적 책임이 있는 대통령도 ‘남 탓’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으로 복귀했다.
전반전이 현재 권력의 갈등이라면 후반전은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갈등이다. 지금 김 대표는 여권에서 차기 주자 1위를 달리는 미래 권력이다. 미래 권력도 여권에서는 갑이다. 밤늦은 술자리에 음 전 행정관, 이준석 전 비대위원, 손수조 청년위원 등이 동석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이 전 비대위원에 따르면 음 전 행정관이 문건의 배후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유승민 의원을 지목했다는 것이다. 김 대표가 발끈하면서 청와대는 서둘러 음 전 행정관을 면직 처리했다. 가장 무거운, 그리고 실질적 책임이 있는 비서실장은 이번에도 역시 침묵으로 대응하고 있다.
청와대 행정관들은 늘공과 어공으로 나뉜다. 늘공은 ‘늘 공무원’의 준 말로 정부 부처에서 청와대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실무자들이다. 어공은 ‘어쩌다 공무원’의 준 말로 집권당이나 국회의원 보좌관, 기타 선거 캠프에서 일하다가 행정관이 된 경우이다. 늘공은 청와대 근무가 끝나면 다시 소속 부처로 돌아간다. 어공은 각자 살길을 찾아 찬바람 부는 벌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박 전 행정관은 늘공이고, 음 전 행정관은 어공이다.
전반전의 주전인 박 전 행정관이 7인 모임의 일원으로 화젯거리가 된 적이 있다. 후반전에 등판한 음 전 행정관도 이른바 십상시로 분류되는 ‘실세’다. 그러나 실세라던 7인방, 십상시는 알려지지 않았다면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는 일’로 구속되고 쫓겨났다. 이는 실세가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공조직과 보고라인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의 스타일이나 우리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면 청와대 행정관은 을에 불과하다. 비서실장과 관할 수석비서관이 책임이 더 무거운데도 애꿎은 실무자만 뭇매를 당하고 있지 않은가.
김 대표에게도 납득할 수 없는 의문이 있다. 술자리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를 왜 굳이 공개(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하고 발끈했을까. 그런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럴 리가 없다’고 대범하게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자제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과거 김 대표는 낮술과 함께 화끈한 농담을 즐기는 ‘형님 리더십’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형님 리더십은 오늘날 김 대표가 여권의 유력한 차기 주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정치적 자산이었다. 문건 배후설은 진실이 무엇이든 김 대표의 형님 리더십에 상처를 내고 협량 이미지를 부각했다.
물론 음 전 행정관이 문건 배후설을 실제로 발언했다면 중대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청와대 행정관과 30대 초반의 청년 정치인이 어울린 술자리에서 나뉜 얘기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었을까. 이들이 주고받은 ‘찌라시’ 수준의 대화는 연일 방송과 신문, 인터넷언론의 헤드라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국민들에게 저급한 권력싸움으로 비칠 뿐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게다가 정윤회 문건 사건으로 드러나고 말았지만, 청와대의 정보력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수준이 아니었던가.
대통령선거는 인물에 대한 평가가 매우 중요하다. 지난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 직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실시한 유권자의식조사에 따르면 지지후보를 선택하는 기준으로 인물에 대한 비중이 45.5%나 됐다. 반면 정책은 27.4%였고 소속 정당은 17.6%에 불과했다. 당시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여유 있게 따돌린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인물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은 다음 대선에서도 이어질 것이다. 김 대표가 대통령선거를 의식한다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스스로에게 ‘인물’에 대한 진지한 평가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전반전과 후반전의 공통점은 갑은 건재하고 을만 책임을 지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 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후반전에 새롭게 등장한 가십거리가 김 대표의 수첩이다. 김 대표 자리가 기자석 바로 아래라는 이유로 의도적으로 공개한 것이라는 추측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 이전 별명은 ‘수첩공주’다.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새누리당 대표가 나란히 ‘수첩’이라는 매개체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테면 ‘수첩 싸움’에 ‘청와대 행정관 등’이 터진 격이다.
드라마 미생에 대한 열풍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에 대한 분노는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갑질’에 대한 폭넓은 공감 때문이다. 존 롤스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10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이명박 정부는 공정사회를 국정과제로 추진했고, 박근혜 정부도 갑을관계 청산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내부에서 갑질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을은 파리 목숨에 지나지 않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대표]
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