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이지혜 기자] 1971년 8월23일 서울 영등포구. 정체를 알 수 없는 군인들이 탄 버스가 청와대로 향하던 중 수류탄에 의해 폭발했다. 사건 초기 군은 이들을 무장공비로 발표했다. 그러다 군 특수부대원들의 난동으로 정정했다. 이 사건은 2003년 영화 실미도 개봉으로 인해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김일성 암살을 위해 실미도에서 각종 훈련을 받은 684부대원들이 열악한 지원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폭발해 청와대로 돌진한 것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러나 영화 개봉 11여년이 지난 지금 실미도는 또 다시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1971년 실미도.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31명의 훈련병 외부 접촉 끊긴 채 40개월 동안 훈련
“회식 다음날 습격… 25년간 입 다물라는 각서 썼다”
1968년 1월21일 북한 정찰국 소속 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로 침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김신조 사건’이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같은 해 4월 684부대를 창설하고 김일성 암살을 위해 실미도에서 훈련을 시킨다. 김신조 일당과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된 부대원들은 각종 힘든 훈련을 무려 40개월이나 버텨낸다.
그러나 북파 계획은 번복됐고 바뀐 남북관계로 인해 이들은 미래를 내다볼 수 없게 된다. 결국 폭발한 부대원들은 1971년 8월 23일 오전 실미도에서 기간병을 총으로 살해하고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을 위해 버스를 탈취, 청와대로 향한다. 그러나 군부대에 저지되고 결국 버스에서 수류탄 폭발로 대다수가 사망한다. 이를 ‘실미도 사건’이라 부른다. 이날 끔찍했던 실미도에서는 24명의 기간병 중 6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취재진은 지난 13일 생존자 중 한명인 양동수(66)씨를 만났다. 양 씨의 진술과 그의 저서 <실미도 생존실화: 자넨, 하나님이 살렸네!>를 토대로 실미도 사건을 재구성해봤다.
1970년 2월, 21세의 나이로 공군에 입대한 양 씨는 같은 해 가을 실미도에 투입된다. 실미도 부대의 정식 명칭은 공군 2325전대 209파견대다. 그러나 이 부대는 1968년 4월이라는 창설 날짜로 인해 일명 ‘684부대’로 불렸다.
유골로 만든 ‘우리의 신조’
22세 청년이 겪은 실미도
실미도 해안가에 만들어진 연병장에는 사람의 뼈로 만든 마크와 그 아래 흰색 글씨로 ‘우리의 신조’라고 적힌 팻말이 있었다. 선임들은 양 씨에게 팻말에 붙어 있는 뼈는 실제로 실미도에서 발견된 연고가 없는 사람의 뼈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연병장 한 가운데에 세워진 유골은 한밤중에도 파랗게 빛이 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오싹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실미도에서의 하루는 훈련으로 시작해 훈련으로 끝났다. 684부대원들은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 암살이라는 임무를 완성한 뒤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위한 훈련을 받았다. 사격, 외줄타기, 수영, 격투, 대검투척술, 유격, 생활훈련 등 각종 훈련이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됐다. 실미도에서 훈련은 생존과 목숨으로 직결됐다. 영화 ‘실미도’에서도 나오듯이 실제로 훈련 중 시간이 초과되면 기간병들은 사격을 가했다. 훈련병들이 실탄에 맞고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들에게는 훈련도 실전이었다. 그러나 훈련 중 총에 맞고 사망한 훈련병은 없었다. 훈련 중 사망한 훈련병은 바다 속 생존훈련 중 익사한 훈련병 1명뿐이다.
이처럼 하루하루 피 말리는 훈련을 받아온 684부대원들의 실력은 훌륭했다. 그들의 사격술은 백발백중으로 깡통을 던지면 정 중앙에 총알구멍을 냈고 여러 개를 동시에 던져도 모두 맞힐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야간 사격은 물론이고 대검도 던지는 족족 나무에 모두 맞혔다. 훈련병들에게 육탄전을 가르치는 일을 한 양 씨가 “훈련병과 1대1로 대결하면 이길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에 기간병들은 훈련병들이 잠든 야심한 시각에 따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실력이 뛰어난 훈련병들은 임무를 수행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2번이나 출정 명령이 있었지만 시작도 못한 채 되돌아와야만 했다. 급변한 남북관계 때문이었다. 당시 훈련병들은 TV, 라디오, 신문 등 외부와의 모든 소통이 끊긴 채 실미도 안에서만 생활했다. 기간병도 마찬가지였다. 정기적으로 받는 외출·외박이 허용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면회는 물론이고 외부로부터 편지도 주고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간병에게는 전역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반면 훈련생들에게는 그 어떠한 희망도 없었다. 거기에 실미도는 외부 지원마저 열악해지면서 생활이 힘들어졌다. 식사는 물론이고 보급품도 부족했다. 추운 겨울 유류 보급이 부족해 섬에 있는 나무들을 모두 뿌리까지 뽑아 땔감으로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실미도를 이탈하는 훈련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68년 8월 훈련 중 훈련생 2명이 무단이탈해 인근 무의도 민가에 숨어 있다가 발각됐다. 또 1970년에는 훈련생 3명이 무의도 주민을 성폭행하고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훈련생을 성폭행하려던 훈련병도 있었다. 이들 훈련생 6명은 자살·처형으로 사망했다. 이렇듯 고립된 섬 실미도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밀려오고 있었다.
1971년 8월23일 월요일
24명의 억울한 죽음
운명의 그날 이전에 이상한 기운은 없었을까. 양 씨는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했다. 실미도 사건이 발생하기 두 달 전인 1971년 6월, 아침에 산악구보 중 훈련생 한 명이 주방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주방을 담당하는 기간병의 목에 칼을 대고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난동을 부렸다. 훈련병이 사살될 만한 위험한 사건이었지만 당시 교육대장의 용서로 훈련병은 목숨을 건지고 난동은 무마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운은 훈련생들 모두에게 퍼져 있었다. 당시 실미도에는 훈련생들을 정식 군인으로 인정하고 제대를 시켜주거나, 월남전에 참전할 수 있게 해달라는 탄원들이 모두 거부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훈련생들을 월남전에 정식 군인으로 보내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양 씨는 “월남전 파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것도 결정된 사안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처럼 불길한 기운이 실미도를 감싸던 1971년 8월20일. 기간병 10명이 2박3일 특박을 받았다. 남은 사람들에게 미안했던 이들은 22일 양손에 술을 사들고 복귀했다. 22일 저녁부터 23일 새벽 1시까지 부대원들의 회식이 진행됐다. 기간병은 물론이고 훈련병들과도 같이 어울려 회식을 즐겼다. 그러나 그날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신 사람은 대부분 기간병들이었다. 훈련병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예고된 그날이 왔기 때문이다.
운명의 날인 1971년 8월23일. 새벽까지 술을 마신 기간병들의 기상 시간은 평소보다 늦었다. 휴게실을 담당하던 양 씨는 이날 인천에서 물건을 받아와야 하는 업무를 위해 남들보다 먼저 기상했다. 그리고 오전 6시10분께 외출 준비를 위해 휴게실에서 옷을 입고 있는 순간 밖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양 씨가 있는 휴게실의 유리창이 깨지면서 유리 파편이 휴게실 안으로 쏟아졌다. 처음에 양 씨는 북한이 공격을 한 것으로 착각했다. 양 씨는 곧바로 총과 실탄이 있는 내무반을 향해 달렸다. 그러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살피는 양 씨의 눈에 50미터 거리에서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훈련병의 모습을 발견했다. 혼란스러워 하는 양 씨의 뒤로 총알이 날아왔다. 양 씨는 목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총알은 양 씨의 목을 관통했지만 양 씨의 생명을 앗아가지 못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양 씨의 귀로 비명소리와 총소리가 들렸다. 무의도가 있는 방향으로 도망가는 기간병들의 목소리와 쫓아가는 훈련병들의 소리가 뒤엉켜 있었다. 양 씨는 무의도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무의도 쪽으로 달리면 백발백중의 훈련병들에 의해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양 씨는 “목에서 샘물 솟듯이 솟는 피를 왼손으로 막으며 바다 쪽으로 뛰어갔다. 통증이 심하고 의식까지 몽롱했지만 뛰고 또 뛰었다”고 회상했다. 해안가에서도 훈련병들에게 들킬 위험을 2번이나 넘기고 겨우 목숨을 건진 양 씨는 오후에 구조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24명의 기간병 중 양 씨를 포함해 단 6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16명의 안타까운 목숨이 실미도에서 사라진 것이다. 또 훈련병들이 서울에서 수류탄이 터져 사망할 때 까지 경찰관 1명과 무고한 시민 5명이 사망했다. 24명의 억울한 죽음이었다.
실미도에서 서울로 갔던 22명의 훈련병 중 수류탄으로 인해 18명이 사망했고 4명이 목숨을 건졌다. 이들은 양 씨가 있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훈련병 생존자 김모씨와 양 씨는 어느 날 우연히 화장실에서 마주쳤다. 김 씨는 영화 ‘실미도’에서 외줄타기 훈련 중 추락해 다리를 다치고 취사병으로 지내던 훈련병 ‘박찬석’ 역할의 실존 인물이다. 김 씨는 양 씨에게 “양 하사님 사셨네요? 천명이십니다”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양 씨는 이 손을 마주 잡을 수 없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주변에서 총을 찾는 양 씨를 헌병들이 말렸다. 양 씨는 “당시는 너무 화가 나 참을 수 없었다. 동료들과 나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라면서도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씨를 비롯한 훈련병 생존자 4명은 몇 달 뒤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했다.
치료를 끝낸 양 씨와 기간병 생존자들은 모두 부대 재배치를 받고 남은 군복무 기간을 채운 뒤 전역했다. 전역할 무렵 군과 정보부 관계자가 양 씨를 찾아와 25년 동안 실미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그렇게 양 씨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실미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세월은 흘러 국민들 기억 속에서 실미도는 잊혀져갔다. 그러다 2003년 영화 ‘실미도’가 개봉하고 흥행에 성공하면서 ‘실미도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실미도에서 사망한 기간병과 훈련병들은 모두 시대가 만든 희생양이다. 양 씨는 “영화가 개봉된 지 10년이 넘었다. 벌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 실미도는 잊혀졌다. 실미도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면서 “이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영화 실미도와 현실의 차이… “대부분 거짓” 영화 ‘실미도’는 천만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다보니 영화 속 내용이 실제 실미도 사건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양 씨는 “영화는 대부분 허구”라며 “사실은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훈련병들이 사형수, 무기징역수 등 죄수자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훈련병들은 대부분 민간인 출신이다. 양 씨는 “실미도에서 훈련병들과 함께 지냈다. 그들 중 재감자는 아무도 없었다”며 “술집종업원, 곡마단원 등 민간인들을 ‘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회유해서 데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공개된 훈련병들의 명단과 유가족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또 영화에서는 ‘훈련병을 전원 사살하라’는 명령을 엿들은 훈련병들이 사건을 일으키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명령은 없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건 전날 기간병들은 새벽까지 회식을 즐겼다. 훈련병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기간병들이 그렇게 술을 마셨을 리 만무하다. 실제로 기간병들은 어수선한 기상 시간에 훈련병들로부터 일방적인 습격을 당했다. 18명 사망, 2명 부상이라는 수치만 봐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교육대장 최재헌 준위는 훈련병이 보는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 김순웅 교육대장은 잠을 자다가 훈련병들로부터 둔기로 머리를 공격당해 사망했다. 훈련병들은 교육대장실에서 실탄을 가져와 기간병 내무반을 습격했다. 영화 ‘실미도’에서 훈련병들은 고무보트를 이용해 북한 해주 해안으로 침투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해주는 북한 해군의 주둔지로 이런 방법으로 침투는 불가능 하다. 실제로 684부대원들이 받은 지시는 서해안에 있는 다른 섬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열기구를 타고 평양에 침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번의 작전 개시와 연이은 작전 취소로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시중에 판매되는 실미도 관련 서적 중 일부는 ‘실미도 훈련생 중 생존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양 씨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단언했다. 그 이유는 양 씨가 훈련병들의 사망을 모두 확인했기 때문이다. 31명으로 시작했던 훈련병들은 실미도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무단이탈 등의 이유로 모두 7명이 사망해 24명이 남아있었다. 사건 당일 실미도에서 훈련병 2명이 사망했고, 16명이 수류탄에 의해 사망했다. 그리고 6명의 생존자 중 2명은 병원 이송 중 사망했고 나머지 4명은 사형 당했다. 양 씨를 포함한 기간병 생존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사망한 훈련병의 시신을 확인했다. 직접 얼굴을 보고 신원을 확인했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던 몇 구의 시신들은 신발에서 이름을 확인했다. 따라서 훈련병 생존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양 씨는 “내 눈으로 직접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훈련병 생존자가 있다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말했다. 실미도 사건이 터진 지 44년이 흘렀다. 당시 사망한 기간병들은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양 씨는 현재 종교 활동에 매진하며 실미도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있다. <이> |
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