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 생각나는 것들…
[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 생각나는 것들…
  • 조아라 기자
  • 입력 2015-01-19 10:10
  • 승인 2015.01.19 10:10
  • 호수 1081
  • 6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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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중앙청에 문 연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는 모든 국민이 합심하고 협력해 일본의 침략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참으로 묘한 나라가 됐다. 정치판, 사회구조, 학문, 노동계, 자본가 등 나라전체가 부패와 대립과 갈등 속에 아수라장이 됐다.  

아무리 좋은 나라, 잘사는 나라가 돼보려 해도 너무 부패해서 모든 국가재산과 개인 재산이 부패한 수많은 권력자에 집중돼 있다. 또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나라 안에 이 나라가 잘 되기는 않기를 바라지거나, 어떻게 하면 더욱 혼란해져서 나라가 망할까만 바라는 세력이 너무 커졌다는 생각이 든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일본에 포섭돼 자금을 받고 우리의 국가적 이권을 일본에게 넘겨주거나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사안을 은연중에 일본에 유리하게 하려는 친일세력도 있다. 총독부 철거문제도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신중하고 심도 있게 검토해야만 했다. 
 
그러나 총독부 철거문제가 정식으로 거론되자마자 모든 언론매체와 정치계, 시민사회단체, 학계 등이 양분화 돼 찬반논쟁을 쏟아냈다. 당리당략에 의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의견을 쏟아내어 어떤 당은 하루아침에 반대의견을 내기도 했다. 어떤 학자와 지식인은 하루아침에 전문가가 돼 논평을 했다. 어떤 방송은 정치인 사회자가 몇날 며칠을 두고 찬반여론을 부추기기도 했다. 소모적 논쟁은 총독부가 철거되고 근정전과 수려한 북악산, 북한산이 보일 때 까지 지속됐다.
 
여기서 다시 총독부 철거 논의가 시작된 사연과 김영삼 정부 때 본격적으로 국책사업으로 결정돼 철거에 이른 사연을 소개할까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내의 향원정 우측,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중앙청(중앙정부청사=중앙청=구 총독부청사)청사로 이전하게 된 사연부터 소개해야 전후사정이 분명해진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대에 국립중앙박물관은 문화재관리국이 지은 지금의 민속박물관에 있었다. 1981년 동원 이홍근 선생이 기증한 「동원선생 수집문화재 특별전시회」가 있었다. 이 때 전두환 대통령이 참가해 자리를 빛냈다. 전시관람 후엔 중앙홀 옆에서 박물관 관계자와 참가자들이 모인 소연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전 전 대통령은 특별전시회를 관람하고 나서 “이제 이 건물은 협소하고 불편하다고 하니 중앙박물관을 중앙청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했다. 중앙청은 같은 경복궁 내이나 경복궁의 정면이고 오랫동안 정치중심이었으니 이제 문화중심으로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또 “중앙청에는 일제 잔재가 남아있으니 훌륭한 우리 문화재를 보고 문화민족의 자부심을 가슴에 품은 채 그 건물을 밟아 주면 일제 잔재를 밟아 몰아낼 수 있다”고도 말했다. 
 
거기 모인 사람이 모두 큰 박수로 찬성의사를 표시해 대통령의 심중을 더욱 굳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청을 국립중앙박물관 청사로 사용하기 위한 기초조사와 내부설계가 진행됐다. 공사가 착수하고 완료됨에 따라 중앙박물관이 중앙청으로 이전해 1986년 8월 21일 새롭게 개관했다. 
 
비록 중앙박물관이 일제의 잔재 속에 들어갔지만 내부를 모두 개조했다. 일자(日字)로 지었다는 부분마다에 건물을 지었다. 건물에는 대강당 전시실, 조사연구실 등이 자리 잡게 됐다. 기존의 사회 교육관과 수장고를 합쳐 연건평 1만6800여 평의 큰 박물관이 됐다. 본관 일층은 행정사무실이었고, 5층인 옥탑엔 학예연구실이 있었다. 그 외의 모든 공간은 전시실, 조사실, 강당 등이 있었다.  
 
▲ 한국미술발전연구소
수태사동구  
 
겸재 정선/ 간송미술관소장
 
수태사는 강원도 금화군 근북면 권천리에 있으나 지금은 휴전선 이북이라 가볼 수 없다. 
 
겸재가 절이 있는 오신산 등 동구의 경관을 가운산법을 겸재 운산법으로 기막히게 변용 발전시켰다. 크고 작은 산들이 비온 후 안개가 자리든 속에 장대하고 고즈넉이 앞뒤로 줄지어 있는 장관을 보여준다. 참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이 동구구나 하고 무릎을 치며 가슴을 탁 트이게 하니 겸재 선생은 진정 위대한 예술가임에 틀림이 없다.
 
겸재는 금강산 등 산수화에 골산과 토산을 대비시켜 골산과 토산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조화로운 산수에 능하다. 이 그림에서는 크고 작은 토산만을 대비시켜 나무가 울창한 산수의 장관을 이루게 했다. 겸재의 무한한 흉중구학의 연출을 우리 같은 범인이야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화면 상단 중앙에 우람한 큰 주봉으로부터 차츰 작은 세 산봉우리가 우측으로 연이어 있어 주경이 된다. 전경으로는 주봉 왼쪽아래로부터 나지막한 산봉으로 둘이 조금씩 낮아지면서 역시 우측으로 연이어 있다. 
 
그래서 이 주경과 전경에 아래위로 엇비슷이 나란히 가는데 두 산자락 사이에 안개가 낀 중에 동구로 들어가는 삼각으로 펼쳐진 넓은 개활지가 있다. 거기 윗부분이 안개로 가려진 우거진 송림이 길게 전개된다. 그 앞에 절로 들어가는 기다란 개울가 길이 있다.
 
또 길을 따라 그 아래 개울이 흐르니 산은 토산같이 보이고 지반은 암반인 듯 자연히 그리 높지도 않지만 깎아지는 암벽이 이어지고 그 아래 넓적하게 네모진 크고 작은 바위가 개울 속에 늘어서 있다.
 
겸재는 담묵찰법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또 미점토산 좌우에 크고 작은 원산이 아주 흐린 미점과 담묵찰법으로 나타나 내는 등 섬세한 부분까지 대담함이 어우러져 있다. 수태사 동굴을 가보지 아니하고도 동구의 경관이 참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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