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이지혜 기자] 부실한 공증절차를 악용해 280억 가량의 회사를 통째로 삼킨 실버사기단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이사회 회의록을 허위로 작성해 공증 받은 뒤 대표이사 명의를 변경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이번 사기단의 가장 큰 특징은 70~80세 노인들이 주축이라는 것이다. 최근 사회에서 노인을 상대로 이뤄지는 사기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반면 이번 사건은 그 ‘노인’이 가해자가 되었다는 데서 특이하다.
부실한 공증절차 악용 허위 회의록 작성·공증해
“기도하고 굿 해줄게” 연륜 묻어나 의심 못해
지난 6일 분당경찰서는 위조한 문서를 이용해 기업을 가로챈 혐의(공정증서원본부실기재 등)로 김모(70)씨 등 2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또 문서 위조에 가담한 박모(88)씨 등 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물류배송업체 ㈜A社의 주식을 0.2% 가지고 있는 소액 주주다. 김 씨는 정모(53)씨 등과 함께 280억여 원 상당의 A사의 토지와 예금 20억 원을 빼앗기로 공모했다.
이들은 지난해 3월20일부터 8월28일까지 모두 14차례에 걸쳐 허위로 임시주주총회의사록과 이사회의사록을 작성, 공증했다. A사의 대표와 이사, 감사 등 임원을 자신들로 바꾼 뒤 성남과 용인, 목포등기소에서 ‘법인등기부등본 기재사항 변경 신청’하는 방법으로 A사의 대표이사 명의를 변경했다.
또 이들은 지난해 5월26일 A사가 소유한 시가 262억 원 상당의 토지를 이모(62)씨에게 매각하는 내용의 ‘매매예약 가등기’를 하고, 7월부터 9월까지 3차례에 걸쳐 A사의 예금채권 20억 원을 인출하려 했으나 지급을 거절 당해 실패했다.
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법무법인에서 공증인가 시 해당 의사록에 대한 절차 및 내용이 진실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대한 실질적 심사를 거치지 않고 형식적 서류 심사에만 그친다는 점을 악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A사의 대표 B씨는 이들의 범행을 지난해 5월 세무서에서 걸려온 사업자등록 명의변경 신청에 대한 확인 전화를 받고 뒤늦게 알게 됐다. 이에 B씨는 재빨리 김 씨 등을 검찰에 고소했으며, 법원에 ‘대표 및 이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그러나 김 씨는 같은 해 8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A사를 합병시킨 뒤 A사의 법인등기를 폐쇄해버렸다.
경찰에서 김 씨 등은 “B씨가 회사를 정리하려고 해 (우리가 회사를) 정상화시키려고 범행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노인 대상 사기 기승
허위 물품 판매 많아
이번 김 씨의 사건이 특이한 이유는 바로 가해자의 연령대가 높다는 점이다. 보통 노인들은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6일 수원중부경찰서는 노인들을 상대로 저렴한 도자기를 ‘액운을 막아주는 도자기’라고 속이고 고가에 판매한 사기꾼 일당 9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노인들에게 1만 원짜리 도자기를 ‘집안에 액운을 막아주고 나쁜 일이 생기면 깨지는 전설의 도자기’라고 속여 198만 원에 판매했다. 또 다른 저렴한 도자기들도 ‘치매예방에 특효가 있다’고 속이는 등 노인을 대상으로 모두 6900만 원 어치나 판매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가 하면 2년 전에는 노인에게 노벨상을 탈 수 있을만한 발명품을 개발했다고 속인 뒤 판매권을 팔아 수억 원을 챙긴 일당이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 이들은 서울과 대구 등지에서 사무실을 차린 뒤 60~70대 노인을 상대로 우주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장치를 발명했다고 속이는 방법으로 445명으로부터 사업판권비 명목으로 7억 원을 받아 챙겼다.
이 외에도 노인을 대상으로 휴대전화, 대출, 만병통치약 사기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노하우·지식 이용해
사기치는 노인 급증
그러나 노인들이 항상 사기를 ‘당하는’ 입장인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동안 쌓은 연륜과 지식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 노인 사기단도 있기 때문이다. 부실한 공증절차를 악용한 위 사건도 이 경우에 속한다.
지난해 11월 서울동부지법은 대신 기도를 해주겠다고 속인 뒤 1억여 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이모(73세·여)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이 씨는 몸이 약한 아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던 C씨에게 접근해 “내가 신께 기도하면 응답해준다. 몸이 약한 당신 아들을 위해 기도했으니 헌금을 보내 달라. 액수는 신이 정해줬다”고 속여 돈을 뜯었다. 기도원에 오래 있던 나이 많은 이 씨가 사기를 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C씨는 의심 없이 이 씨에게 돈을 건넸다가 사기를 당한 것이다.
또 지난해 10월 전북에서는 노총각 아들이 결혼할 수 있게 굿을 해주겠다며 부모를 속인 뒤 400만 원을 챙긴 김모(69세·여)씨가 구속되기도 했다. 김 씨는 무속인 복장을 하고 농촌지역을 돌아다니며 노총각 아들이 있는 집에 접근해 젊은 여자와 만날 수 있도록 살풀이를 해주겠다고 속여 돈을 가로챘다. 전과 31범이었던 김 씨는 자신의 사기 노하우를 이용해 손쉽게 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노인을 대상으로 만병통치약을 판매한 ‘노인사기단’도 있으며, 노인으로 구성된 ‘노인 절도단’이 경찰에 검거된 일도 있다.
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