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악문 유가족 “사람도 아닌 짐승, 내가 죽이고 싶다”

지난해 10월 온 국민을 충격에 빠트렸던 ‘고시원 살인마’ 정상진(31)이 법정에서 유가족들과 대면했다. 지난 21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 21부 재판장에서 열린 속행 공판에 출석한 유가족들은 “죄책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괴물을 본 것 같다”며 또 다시 오열했다. 지난주 <일요서울>과의 단독 인터뷰(본지 769호)에서 “내가 저지른 일이 후회스럽다”는 심경을 밝히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던 피고인 정상진. 그는 이날 유가족들이 참석한 공판장에서도 무표정으로 일관해 반성의 기미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얼굴은 오늘 처음 보는 건데 진정이 될까 모르겠어요.”
정씨의 속행 공판이 예정된 시간은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이보다 20여분 정도 일찍 법정으로 들어선 유가족 김양인씨는 떨리는 손을 애써 맞잡으며 비어있는 피고인석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씨의 손에 언니(故 김양선)를 잃은 김씨는 벌써 4개월 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여동생(故 서진)을 잃은 축구선수 서성철(23)씨의 큰 형도 굳게 입을 다문 채 정씨가 재판장에 들어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외에 머물고 있는 남동생을 대신해 공판장을 찾은 ‘큰 오빠’는 말을 아꼈지만 살인마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보자마자 죽이고 싶었죠”
서씨는 “눈앞에 보이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싶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절대 흥분해서는 안된다’는 자문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이 역력했다.
마침내 옥색 수의를 입은 정씨가 피고인석에 들어서자 유가족들은 숨을 멈췄다. 하나밖에 없는 언니와 사랑스러운 막내 여동생을 갈가리 난도질한 살인마의 표정이 지나치게 평온한 탓이었다.
사건을 심리한 이광만 부장판사는 공판을 시작하기 전 방청석에 앉아있는 유가족과 취재진을 알아보고 “유가족에 한해 특별히 발언 권한을 주겠다”며 배려하기도 했다. 고시원 사건이 사회적 파장이 큰 참사였던 만큼 여론을 의식한 태도였다.
“정씨의 초·중·고 생활기록부 달라”
이번 공판에서 눈에 띄는 쟁점은 정씨의 변호인이 요청한 심리감정 결과였다. 정씨의 변호를 맡은 이 모 변호사는 지난 5일 열린 첫 번째 공판에서 정씨의 범행과 관련된 심리 검사를 요청했었다.
이날 재판장에는 법원이 선정한 심리분석 전문가가 참석해 정씨의 심리감정 일정과 조사 방법 등을 공개했다. 정씨의 심리감정을 담당할 전문가로는 황순택(52) 충북대 심리학과 교수가 선정됐다.
황 교수는 검찰 측에 정씨의 초·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입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 피고인의 학창시절 기록을 통해 그의 심리 상태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황 교수의 요청은 검찰과 변호인 모두에게 받아들여졌다.
이미 국립법무병원(원장 최상섭)은 ‘정씨는 사이코 패스나 정신이상자가 아니며 현실 감각이 충분히 있는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진단을 내린 바 있다. 과연 이를 뒤집을 검사 결과가 나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만약 정씨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소견이 나올 경우 그에 대한 처벌 수위도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유가족들은 이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둔 듯 황 교수의 존재가 못내 껄끄러운 눈치였다.
유가족 김씨는 “이젠 아무도 못 믿겠다. 만약 저 사람(황 교수)이 ‘정상진은 정신병자’라는 진단을 내리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냐”며 눈물을 글썽였다.
김씨는 “만약 정신병을 이유로 감형이라도 받는다면 수십 년 뒤에라도 저 살인마가 길거리를 활보할 텐데 그럼 똑 같은 비극이 다시 반복될 게 분명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정씨 변호인 “증거 충분한데 유족 말 들을 필요 있나”
정씨에 대한 심리감정은 다음달 말쯤 마무리될 예정이다. 황 교수는 “2월 초 정씨의 생활기록부를 입수하면 구치소의 동의를 받아 5시간 정도에 걸쳐 면담과 심리 검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날 공판에서는 유족들의 증인 신청 여부를 놓고 정씨의 변호인과 재판부 사이에 짤막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부장판사는 “이왕 유가족 분들이 나오셨으니 정식으로 증인 신청을 하시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이에 김씨는 “유가족 보다는 당시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부상자가 있다.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려면 생존자를 증인으로 세우는 게 더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정씨의 칼에 치명상을 입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생존자 김대영(30)씨를 지칭한 것이었다.
그때 정씨의 변호를 맡은 이 모 변호사가 나섰다. 피의자에게 불리한 증언이 나올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 변호사는 “이미 사건과 관련해 많은 증거물들이 쏟아져 나왔고 피의자도 범행 사실을 전부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유족 등 또 다른 증인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있느냐”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밝혔다.
현재 정씨는 선처를 읍소해줄 가족들마저 연락이 닿지 않거나 증인 출석을 거부한 상태다. 불리한 증언과 증거물이 산처럼 쌓여있는 상황에서 이 변호사의 주장도 타당성은 있다. 하지만 변호인의 노력에도 정작 정씨는 재판 자체에 관심이 없는 듯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는 이 부장판사의 중재에도 정씨는 “할 말 없다”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최소한 ‘죄송하다’는 입에 발린 사과만이라도 기대했던 유가족들의 허탈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정씨의 세 번째 공판은 오는 3월 6일 오후 2시에 속행될 예정이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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