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출신 인물이 단순 떼강도로 돌변?
지난 11일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사위 이모(60)씨의 집이 포크레인까지 동원한 장정들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은 이번 사건을 ‘YS의 비자금이 이씨의 집 지하실에 숨겨져 있다’는 헛소문을 액면 그대로 믿은 일당들이 벌인 ‘무모한 떼강도’ 행각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 그러나 사건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산적해있다.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전원주택이긴 하지만 30명이 넘는 인원이 포크레인을 앞세우고 집주인 이씨를 협박할 만큼 일당은 자신감이 넘쳤다. “지하 벙커에 숨겨진 돈이 나오면 YS는 끝장난다”며 호기를 부렸다는 목격자의 증언도 있다. 그 만큼 일당은 ‘YS의 비자금’이 문제의 저택 지하실에 있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과 물증을 갖고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그들은 또 무모하리만치 경찰 출동을 의식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한 20대 청년들에게는 ‘중요한 특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을 진두지휘한 ‘배후세력’이 있다는 주장도 불거지고 있다. 무엇보다 육군 준위 출신인 김모(54)씨가 하루아침에 전직 대통령 일가를 노린 떼강도로 분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우린 UN 소속 특수요원”
이번 사건의 개요는 괴한 32명이 포크레인으로 무장한 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위인 이씨의 집 대문을 부수고 난입, “비자금을 내놓으라”며 두 시간 가까이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붙잡힌 것으로 요약된다.
눈에 띄는 것은 경찰에 붙잡힌 김씨를 비롯한 주동자들이 “우리는 ‘UN국제금융수사단’으로 특수임무를 수행중이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비자금 회수 임무를 맡은 UN 178개국 국제금융수사단 소속이다. 태평양에 있는 로널드 레이건 항공모함의 지령을 받고 있으며 부산항에 정박 중인 선박에 UN사무국이 있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자신들은 국제 조직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 특수요원들이라는 얘기다.
당시 집주인 이씨의 구조 요청으로 현장에 출동한 사설 경비 업체 직원들도 “정부의 특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괴한들의 주장에 막혀 한 차례 철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이 내세운 단체가 존재조차 없는 ‘유령조직’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경찰에 붙잡힌 이들이 처벌을 피하고자 황당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는 얘기다.
경기 광주경찰서 관계자는 “실제 미국 뉴욕 주재관을 통해 확인한 결과 이들이 소속됐다고 주장하는 단체는 유령단체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범인들이 검거 직후 ‘엉뚱한 주장’을 되풀이 했지만 검찰에 송치된 뒤에는 범행 동기 등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이웃 주민들은 “보름 전쯤 YS의 사위인 이씨가 집 증축 공사를 마쳤고 지하 보일러실이 보통 집에 비해 상당히 커 인부들 사이에 ‘비자금을 숨기기 위한 창고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에 경찰은 뜬소문에 들뜬 일당들이 ‘비자금이라면 경찰에 섣불리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아래 황당무계한 강도짓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치 배후 ‘있다, 없다’
경찰에 따르면 괴한들은 육군 준위 출신인 김씨를 포함한 주동자 4명과 아르바이트생 28명으로 구성됐다. 김씨 등은 대부분 휴학생인 청년들에게 “정부 기관의 일을 하기로 했다”며 일당 20만원씩을 계산해주는 조건으로 이들을 고용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 아르바이트생은 모집책인 전모(34)씨의 말만 믿고 사건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씨 등은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 뒤 “일이 끝난 뒤 일당을 계산해 주겠다”며 이들을 승합차 등에 나눠 태우고 현장으로 향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구속된 김씨 등을 제외한 일당들은 특별한 정치색을 띠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들을 진두지휘한 주동자들의 출신성분이다. 경찰 관계자는 “구속된 김씨 등 일당 4명과 공범으로 수배한 나머지 일당들은 특정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적 활동을 한 기록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일각에서 제기된 ‘정치 배후설’에 대한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다.
수사팀 관계자는 “이번에 구속된 용의자들 대부분은 사기와 폭력범죄를 저질러 전과만 4~16범에 달한다”고 밝혔다. 범행 수법이 대담하긴 하지만 전과자들이 작당해 저지른 단순 떼강도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수사 결과에 따르면 김씨 등은 7~8년 전 다단계 사업을 하면서 친분을 쌓아왔다. 이 중 전씨는 과거 용역업체 직원으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이번 사건에서 ‘현장감독’ 역할을 도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관계자는 또 김 전 대통령의 측근이 제기한 ‘늑장출동’ 의혹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지난 20일 모 일간지는 김 전 대통령의 측근 말을 인용해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UN특수요원’이라며 버티는 일당에게 속아 철수해 버려 검거에 시간이 지체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경찰 측은 “일당이 침입한 직후 경보시스템이 울려 파출소 직원들이 곧바로 출동해 제압했지만 워낙 인원이 많아 강력계 형사와 기동타격대 50여명이 추가 동원되는 바람에 검거에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김씨 등 일당들은 지난 20일 검찰로 송치된 뒤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사위를 폭행해 코뼈를 부러트리고 일당이 손에 쥔 것은 10만원짜리 수표 석장과 김 전 대통령의 사진 액자뿐.
일당이 중장비를 동원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씨의 지하실을 습격한 속사정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다만 사건이 벌어진 지 무려 9일 동안이나 외부에 철저히 비밀로 부쳐진 것에 의혹의 눈초리가 집중되고 있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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