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들의 잠자리가 수상하다…병장과 이병 문쪽에서 자다 봉변

그 남자들의 잠자리가 수상하다. 철저한 계급사회인 내무실 안에서 최고참 병장부터 이등병까지 5명의 병사가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내무반 최고참인 허모 병장은 어째서 후임병인 임모, 장모 상병 뿐 아니라 막내인 이등병 김모, 이모 병사등과 찬바람 드는 문 쪽에서 함께 봉변을 당했을까. 군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병장과 이등병이 입구 쪽 침상에 함께 눕는 일은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강원도 철원군 최전방 초소(GP)에서 22명의 전우가 잠을 자고 있던 내무반에 수류탄(KG14·세열수류탄)을 터트려 5명을 생사기로에 빠트린 범인이 나흘 만에 붙잡혔다.
남파 간첩 등 외부인의 소행이냐, 내부인의 자폭시도냐를 놓고 장기화 기로에 놓였던 사건은 사건 현장에 있던 소대원, 황모(20) 이병의 단독범행으로 잠정 결론지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황 이병의 범행 동기와 문제의 수류탄이 터진 위치에 대한 의문점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병장과 이등병 나란히 취침?
수류탄 폭발로 부상을 입은 허 병장과 후임병들은 내무실 문이 있는 바깥쪽에 누워 있었다. 언론에 보도된 현장 도면에 따르면 이들이 잠든 침상의 옆과 앞은 빨래 건조대로 가로막혀 있다.
가장 큰 부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진 이 이병은 5명 가운데 안쪽에서 두 번째 침상에 누워있었다. 일반적으로 군대에서는 찬바람이 들이치는 문 쪽에는 고참이 눕지 않는 관례가 있다. 따라서 허 병장과 임 상병 등 선임들은 이 이병의 바로 옆이나 최소한 한 자리 건너 침상에 잠들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확실한 것은 모든 부대를 막론하고 최고참인 병장과 이등병이 나란히 또는 가까운 곳에 눕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들 5명의 부상병들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함께 잠자리에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황 이병의 범행 이면에는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부대 내 성추행 등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불거질 만 하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용의자로 지목된 황 이병은 내무실 안쪽에서 문 쪽을 향해 수류탄을 굴린 것으로 보인다.
황 이병이 자살이나 소대원과의 자폭을 위해 수류탄 투척을 결심했다고 단정 짓기 이른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의 수류탄은 5명의 병사가 잠들어 있는 침상의 맞은편 건조대 근처에서 폭발했다. 황 이병이 부상병들 중 특정한 ‘누군가’를 노리고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황 이병이 투척한 수류탄은 KG14 경량화 세열수류탄이다. 8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260g 정도의 무게로 진회색의 정구공 정도 크기다. 폭약과 뇌관, 1만~2만개 가량의 초미니 쇠구슬로 이뤄진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아 던지면 3~4초 뒤 폭발한다.
수류탄 속 쇠구슬은 지상에서 45도 각도로 퍼지기 때문에 서 있는 사람은 죽거나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도 병사들이 침상위에 누워있었고 수류탄이 바닥에서 터져 파편이 튀는 각도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수류탄 속 쇠구슬은 10~15m 거리에서 1미리 두께의 철판을 뚫을 수 있으며 4m 내에서는 1m²당 8.6개의 쇠구슬이 퍼져나간다.
황 이병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것은 수류탄이 터지지 않도록 탄통을 고정했던 녹색 테이프 뭉치가 그의 관물대 근처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군 당국은 또 문제의 수류탄 안전손잡이에서 황 이병의 지문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황 이병을 추궁한 수사팀은 그로부터 범행에 대한 모든 자백을 받아낸 것으로 전해졌다.
황 이병은 사건이 발생한 지 사흘 만인 지난 지난달 26일 긴급체포 됐다. 조사결과 그는 사건 당일 초소근무를 마치고 복귀하던 중 GP 상황실에서 이 이병의 탄통에 든 수류탄을 몰래 가지고 나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황 이병 범행, 어떻게 드러났나
육군수사본부에 따르면 지난 7월 입대한 뒤 평소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황 이병은 “GP의 실상을 알리고 싶다”며 동료의 탄통에서 수류탄을 훔쳐 내무반에 투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당초 내부인에 의한 의도적 범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수사팀의 예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과다. 육군 조사단의 한 관계자는 최근 한 언론을 통해 “수류탄을 터트린 범인은 GP 전체 소대원 30명 가운데 사건 당시 내무반에 있던 병사 22명 중 한 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관계자는 “상황실 근무자 3명과 GP 경계병 2명, 부GP장실과 취사장에 있던 부GP장과 분대장, 취사병 등 부대원 8명은 당시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확인된 상태”라고 덧붙였었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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