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사기꾼으로 돌아온 청와대 비자금 세탁팀
전문 사기꾼으로 돌아온 청와대 비자금 세탁팀
  • 오두환 기자
  • 입력 2014-12-22 11:07
  • 승인 2014.12.22 11:07
  • 호수 1077
  • 1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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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동료와 짜고 유령회사 설립 순진한 여대생 등치기도

‘금융자문 투자설계 분야 재무이사’라고 속여 직원들 뽑아
잘 나가던 농협 간부에서 유혹 못 이겨 전과 15범으로 추락

[일요서울|오두환 기자] 전문 사기꾼들 사이에서 많이 통용되는 검은돈의 출처는 ‘청와대’와 ‘전 정권 실세들’이다. 이들에게 ‘청와대’와 ‘전 정권 실세’ 만큼 그럴듯한 자금원은 없다. 설사 범죄가 들통이 나더라도 실체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만약 수사에 들어간다 해도 청와대와 전 정권 실세들까지 수사를 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이러한 검은돈을 이용한 사기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7일 지방 농협 지소장 출신으로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20대 여성들을 비서로 채용한 뒤 투자명목으로 거액을 뜯어낸 박모(50)씨와 백모(32)씨가 경찰에 붙잡혔다. 박 씨와 백 씨는 지난해 4월 14일부터 올해 9월 18일까지 서울, 인천, 경북 등을 돌며 25명에게 8억7000만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주식 실패로 범죄자 길
청와대 봉황 직인 사용

박 씨는 지방 농협 지소장 출신으로 2005년 청와대 비자금 사기단에 연루돼 66조 원을 송금하다 실형을 살았다. 당시 이 사건은 ‘청와대 비자금 세탁팀 사건’으로 불리며 전국이 떠들썩했다. 

박 씨는 2005년 당시 경북 안동농협에서 근무했다. 20년 가까이 농협에서 일해 온 그는 성격이 내성적이었지만 성실한 근무태도를 인정받아 지소장까지 올랐다. 시골마을의 금융기관 간부로 소박하게 살던 박씨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주식투자가 잇달아 실패해 거액을 날리면서부터였다.

박 씨는 서울에서 사채를 끌어들여 더 큰 빚을 지자 대담한 사기행각에 가담하게 됐다. 게다가 몸이 약한 둘째 아들의 병원 치료비 등으로 가정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박씨는 마지막 방법으로 명예퇴직을 신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박 씨에게 ‘청와대 비자금 세탁팀’의 일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조모씨가 접근해왔다. 이들은 “금융실명제 도입 이후 잠자고 있는 계좌의 돈을 모아 이체해 국정 자금으로 사용하게 해주면, 거액의 수수료와 재경부의 고위직 자리도 주겠다”고 말했다. 서울 한남동 고급주택에서 청와대의 봉황 직인이 찍힌 통장까지 들이밀자 박씨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박씨는 설 연휴 하루 전인 2005년 2월 7일, 미리 지정된 계좌로 66조 원을 송금했다. 자신이 관리하던 농협 내부 전산망 접근용 단말기 카드를 이용했다. 송금은 1회 한도인 2조 원씩 총 33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그때마다 송금 담당 직원은 미리 심부름을 보냈다.

당초 90조원을 송금하기로 했지만 그나마 박 씨의 거액 이체를 수상히 여긴 전임 지소장의 전화로 66조 원만 송금할 수 있었다. 박 씨는 송금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잠적했다.

하지만 청와대 비자금 회수팀 일당이 별도로 벌인 7조 원대 금융사기가 경찰에 덜미를 잡히면서 박 씨도 경찰의 추적을 받다 강남의 한 찜질방에서 검거됐다. 잘 나가던 농협 간부가 조 단위의 천문학적인 금액을 빼내려다 들통이 나자 동료들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박 씨는 5∼6년 전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신내림 증상이 있어 정신이 혼미하다’는 동료들의 수군거림도 있었다.

교도소 동료와 사기 기획
외제차 몰며 임원행세

사기죄로 1년간 복역하고 출소한 박 씨는 본격적인 범죄자의 길로 들어섰다. 출소 후 직장을 잃은 박 씨는 수차례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면서 ‘전과 15범’이 됐다.

박 씨는 최근 유령회사를 만들고 구직 사이트를 통해 20대 여성들을 비서로 채용했다. 그런 뒤 “좋은 투자처가 있는데 대출받아 투자하면 이익금도 주고 대출도 대신 갚아 주겠다”고 속여 이들에게서 모두 8억7천만 원을 뜯어냈다.

경찰에 따르면 이번 사건으로 검거된 또 다른 주범 백 씨와 박 씨가 만난 것도 교도소에 있을 때였다. 2010년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출소 후 범행을 모의했다. 백씨 역시 사기 전과 7범의 상습범이었다.

이들은 구치소에서 모의한 대로 출소 후 레인보우인베스트먼트, JMM에셋 등의 투자전문회사를 빙자한 유령회사를 차린 후 인터넷 사이트에 아르바이트 모집 광고를 내 여직원을 모집했다. 이 과정에서 박 씨는 ‘금융자문 투자설계 분야 재무이사’라고 속이며 여대생들을 취업시켜온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관계자는 “사무실을 임대해 ‘정 사장’ 등으로 호칭하며 외제차를 몰고 다녔다”며 “강남의 노래방에서 남성도우미들을 불러 여직원들과 함께 놀게 해주는 등 실제 투자회사 임원인 것처럼 행세했다”고 말했다.

투자·통대환 대출 권유
여대생에게 돈 뜯기도

박 씨와 백 씨는 직원들이 입사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나면 직원들에게 투자를 권유했다. “좋은 투자처가 있는데 투자를 하면 이익금을 돌려주겠다”는 식이다. 주변에 대출을 받은 지인들이 있는지도 빼놓지 않고 물었다. “‘통대환 대출’을 통해 대출금도 갚아주고 이익금도 주겠다”고 속였다. 통대환 대출은 고금리 대출을 대신 갚아줘 신용등급을 올린 뒤 시중 은행에서 이보다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아 대출원금과 알선수수료 등을 받아 챙기는 방법이다.

일당은 처음 한두 달은 이익금이라며 일정액을 투자자에게 돌려줬다. 하지만 이내 잠적을 했고 다른 지역에서 피해자 명의를 빌려 새 법인을 차리는 수법으로 서울, 경기 인천, 경북 경산 등에서 25명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였다.

피해자는 모두 20대로 이중 24명은 여성이었다. 대부분 학자금, 성형비용 등으로 대출을 끼고 있었다. 경찰관계자는 “신용등급을 올리기 위해서는 신용카드를 자주 써야 한다”며 피해자들의 신용카드를 빌려 사용하기도 했고, 여대생에게 사귀자고 한 후 1800만 원을 뜯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의 황당한 사기극은 경찰의 체포로 막을 내렸다. 이들은 피해자에게 받은 돈 대부분을 유흥비, 채무 변제로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직 농협 지소장에서 청와대 비자금 세탁팀 사기사건까지 저지른 박 씨는 결국 또다시 교도소로 들어가게 됐다.

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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