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서울의 남북 기본 축마저 허물어뜨린 일본
[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서울의 남북 기본 축마저 허물어뜨린 일본
  • 조아라 기자
  • 입력 2014-12-22 10:29
  • 승인 2014.12.22 10:29
  • 호수 1077
  • 6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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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참혹하게 훼손된 조선 정궁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본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 없앴다. 이어 경희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등의 일부를 거의 전부를 대량 파괴했다. 창경궁은 아예 동물원으로 바꾸었다. 일본은 경복궁의 350여 채 7700여 칸의 전각을 거의 헐어버리고 일부는 일본으로 실어갔다. 그래서 근정전 일각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남은 궁궐은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서울 시내에 도로를 개설하거나 도시를 정비하며 유적과 건물 등을 마구잡이로 헐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아름답던 서울이 순식간에 몰골사나운 도시가 됐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경복궁내의 전각을 허물어 버리더니 근정전과 근정문 앞뒤를 허허벌판으로 만들었다. 그리곤 1915년 이 벌판에서 거대한 축산물박람회를 열었다. 경복궁은 서울에서도 화강암이 풍화해 마사토가 지반이다. 그래서 언제나 깨끗하고 물이 잘 빠져서 조강한 곳이라 불렸다. 여기에서 축산박람회 등 온갖 짐승 박람회를 연 것은 짐승의 분비물과 쓰레기 냄새로 왕실과 경복궁을 욕보이고 나아가 우리 민족을 욕보인 것이다.
 
일본은 그후 근정전 앞 넓은 터에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그 당시 남쪽 멀리서 경복궁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에는 땅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기와집 벌판에 거대한 총독부 건물만 보인다.  총독부는 마사토 지반인 이곳의 지반침하 위험을 막고자 백두산에서 가져온 소나무 파일 수 천 개를 박고 그 위에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건물 기초 작업을 하느라고 파낸 흙으로 근정문 앞 총독부 대지를 북돋웠다. 흙이 켜켜이 쌓여 제일 높은 곳은 거의 2m에 달할 정도였다. 총독부 건물의 높이만해도 56m다. 거기에 대지까지 돋우어 건물 전체를 2m정도 더 높게 만든 것이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경복궁 동북지점인 지금의 민속박물관 정문 쪽으로 허물어 옮겨졌다. 동십자각은 담 밖으로 내쳐지고 서십자각은 없애 버렸다. 남쪽 궁 담은 다 헐어버리고 철창같이 생긴 철책으로 바꾸었으니 조선의 정궁은 참혹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일본은 조선을 영구 식민지화 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우리 산하를 마음대로 짓밟고 조선인을 마음대로 잡아 가두고 죽였다. 우리 문화를 파괴하고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문화의 뿌리를 없애서 우리 민족을 야만인처럼 대하려 했으며 우리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마구 짓밟았다. 독립 애국지사를 잡아다 고문하고 형무소에 잡아넣는 등 갖은 악행과 비인간적인 극악한 죄를 저지른 총 본산이 총독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자는 논의가 있던 것이다. 
 
총독부 건물의 철거 이유는 이게 다가 아니다. 일제는 먼 앞날을 보고 모든 침략행위를 진행했다. 총독부 대지를 2m 정도 높이니까 그나마 남아있던 근정전 회랑의 바깥쪽 기단부가 모두 흙속에 묻혀 건물이 볼썽사납게 됐다. 돈화문 대궐 앞길도 일제가 도로를 높이고 돈화문 앞뜰을 메꿔 돈화문의 기단과 계단이 없앴다. 경복궁과 돈화문 주변길이 모두 높아져 경복궁 남쪽과 남쪽의 동서 두 곳은 도로보다 1~2미터 푹 내려앉아 버렸다. 경복궁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계단을 올라가야지만 주변도로로 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일제는 지금의 창덕궁과 종묘사이를 갈라서 길을 냈다. 이것을 서울시가 터널을 만들어 창덕궁과 종묘를 다시 예전대로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다. 연결을 위해서는 돈화문 앞 동서 도로를 대략 1~1.5미터를 파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돈화문이 살고 창덕궁과 종묘가 제대로 연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예산도 많이 들고 번거롭고 귀찮은 과정이 된다. 그래서 도로를 파내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기로에 서있는 것 같다. 서울시가 제대로 복원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문제가 여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일본은 온갖 악행과 만행만 저지르고 그들 나라로 돌아갔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겨놓은 과제는 각 분야에서 수도 없다. 경복궁 남북의 축은 숭례문 쪽으로 가깝게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총독부를 지으면서 총독부의 방향을 경복궁의 남북축에 맞추지 않고 동쪽으로 3° 가량 틀어서 남산 쪽을 향하게 지었다. 다시 말해 경복궁의 남북 축(軸)과 일부러 비뚤어지게 만든 것이다. 
 
원래 경복궁 남쪽에는 육조거리가 있었다. 지금 광화문 앞길의 폭과 같은 엄청나게 넓은 대로가 있었다. 일본이 허물고도 상당량 육조의 모습이 남아있었으나 우리 손으로 나머지 육조건물을 없애고 새로운 건물을 세웠다. 문제는 일본인들이 광화문 앞 동서도로를 총독부와 같은 방향으로 만들고 이 도로와 직각이 되게 광화문 앞 도로를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 광화문 앞 도로는 옛날 경복궁 남북의 축과는 크게 달라져 버렸다. 
 
경복궁 바로 앞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지만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면 원래 위치에서 수십 미터 동쪽으로 이동해버렸다. 그 결과 경복궁 앞에서 남대문으로 가려면 시청 앞에서 서쪽으로 상당히 휘어 구부러진 길을 통해야만 갈 수 있게 됐다. 가장 중요한 서울의 남북기본 축을 일본은 허물어뜨린 것이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는 물론 해방직후에도 애국지사들은 총독부 건물만 보아도 피가 거꾸로 솟아오를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월송정 

겸재 정선 32.3x57.8cm
 
지난 14일부터 동대문 서울 디자인플라자(DDP)에서 2차 간송 수집문화재 전시가 열리고 있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등 조선후기의 진경산수 명화가 전시돼 보는 이의 마음을 놀랍고 즐겁게 만든다.
 
단원의 진경도 아름답지만 겸재의 진경은 마음을 뒤흔들면서 탁 트이게 한다. 그중에 ‘월송정’ 그림 앞에 발을 오래 머물게 한다. 바닷바람이 몰려올 것 같고 정자와 소나무와 언덕들이 마치 바다로 쏠려들 것 같은 독특한 구도이다. 겸재의 의중이 담긴 필력은 보는 사람의 마음도 바다로 쏠려들게 만든다.
 
‘월송정’은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바닷가에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제일의 정자와 명승으로 꼽히는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월송정’에 대해 “푸른 소나무가 만구루나 되고 백사(白沙)는 눈 같은데 소나무사이에 개미가 다니지 않고 새도 깃들지 않는다”라고 했다. 눈같이 흰 백사장에 만 그루의 솔숲이 있는 정자이니 절경일 수밖에 없다. 
 
그림의 중앙 부 약간 앞쪽에는 겸재 특유의 발묵과 비슷한 필묵법으로 소나무 숲을 농담의 변화를 절묘하게 둬 구름이 일 듯 그렸다. 정자는 보통 정자가 아니고 성벽위에 월송진성(越松鎭城)의 성문인 것 같으나 경관이 아름다워 정자의 구실도 했던 것 같다.
 
솔숲과 정자의 앞뒤에도 소나무가 여기저기 둘러있어 운치를 더한다. 왼쪽엔 파도치는 망망대해의 일각이 바라보인다. 정자 앞 저 멀리 바닷가에 토산석봉이 바다로 향해 옆으로 엎어질 듯 돌연히 솟구쳐 있어 그림에 생동감을 더한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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