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 참사’ 늑장출동 진실게임
‘고시원 참사’ 늑장출동 진실게임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8-11-18 16:34
  • 승인 2008.11.18 16:34
  • 호수 760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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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뭐가 못미더워 확인 못해주나”
(왼쪽상단부터 시계방향) 마지막 생존자 김대영씨의 선혈이 낭자한 사건 현장의 내선 전화기. 1번과 9번의 숫자 위에 김씨의 피가 묻어 있어 당시의 위급했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 김씨의 119 구급활동 일지. 정확한 신고시간 없이 출동 시각과 현장·병원 도착시각만 적혀있다. · 지난 4일 오후 고시원 참사 한국인 피해자 모임 대표로 서성철씨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범인의 칼날에 찢긴 김씨의 왼손

“지구대에서 사고 현장까지 5분 거리 입니다. 10분만, 아니 5분만 빨리 왔더라면 내 동생은 죽지 않았을 겁니다.”

지난 11월 4일 오후 사고 당시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서울 논현동 D고시원 앞. 고시원 참사 희생자 가족 대표로 나선 서성철(24·프로축구선수)씨는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삼켰다.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서울 논현동 D고시원 방화·살인사건. 그러나 유족들과 부상자들의 외로운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참사를 일으킨 정상진(31)씨가 구속되고 고시원 주인 조모(60)씨가 소방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됐지만 피해자들은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들은 경찰의 늑장대응이 참사를 키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건의 실마리는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유일한 열쇠를 쥔 경찰이 법령을 근거로 결정적인 증거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늦어도 8시 30분에 신고했습니다. 살인사건이라고, 사람들이 도살당하고 있다고요.”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인 김대영(29)씨는 <일요서울>과의 단독인터뷰(본지 598호 보도)에서 경찰에 대한 원망을 격하게 쏟아냈다.


“아침부터 무슨 살인사건?”

살인마가 휘두른 칼에 찔려 내장의 2/3가 비어져 나오는 중상을 입은 김씨는 과다출혈에 눈앞이 흐려지는 상황에도 구내전화기를 들어 112 신고센터에 사건을 접수시켰다.

그러나 막상 신고를 접수받은 상대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신고센터 직원은 다급한 김씨의 구조 요청을 장난 전화로 치부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상황센터 경찰 직원에게 ‘살인사건’이라는 말을 하자 ‘아침부터 무슨 살인사건이냐’며 타박을 줬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살인마의 도살극을 경찰이 부채질 한 것이나 다름없다.

김씨의 사고 당시 구급활동 일지를 보면 119 구급대는 8시 58분에 출동해 9시 4분 현장에서 김씨를 발견하고 9시 16분 서울 용산 순천향병원으로 그를 이송했다. 김씨는 “적어도 30분 이상 죽음의 공포에서 홀로 싸웠다”며 “고시원 이웃들을 죽인 범인은 정상진이 아니라 경찰과 구급대”라고 강변했다.

<일요서울>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김씨의 구급활동 일지와 또 다른 생존자들의 증언을 입수했다. 김씨가 입원한 순천향병원 측으로부터 받은 김씨의 구급활동 일지에는 정확한 사건 신고 시작이 적혀있지 않았다. 결국 직접 신고를 한 신고자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당시 119에 사건을 신고한 것은 이모(남·연령미상)씨로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자신의 신분을 감춰줄 것을 요청했다.

이씨에 따르면 아침 출근길에 나섰던 그는 민대자(51·여·사망)씨가 고시원 3층 창문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곧장 휴대폰으로 119를 눌렀다.

그가 기억하는 신고 시간은 8시 45분 경. 계산대로라면 사고가 접수된 뒤 13분여 만에 강남 소방서 119 구급대가 현장에 도착해 김씨를 구조한 것이다.

미심쩍은 것은 이씨가 신고를 하던 8시 45분까지 문제의 고시원 앞에는 구급대나 경찰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씨는 “사람이 떨어지고 안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에 불이 난 걸 알았다. 그래서 곧장 신고를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8시 45분경까지 경찰 안 보여”

혹시 그 시간에 경찰 대원이나 구급대원들이 먼저 출동한 것을 보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씨는 “못 봤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경찰이 발표한 사건일지에 따르면 피의자 정씨가 처음 고시원에 불을 지른 시각은 8시 15분 경. 그리고 5분 뒤부터 살육이 시작됐다.

이씨와 경찰의 주장대로라면 살인마 정상진은 적어도 20분 가까이 마음대로 고시원 입주자들을 도륙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당시 사건의 첫 번째 희생자와 그를 치료한 병원은 경찰 신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정씨에게 당한 첫 일격으로 왼쪽 팔에 관통상을 입은 장종환(29)씨는 곧바로 고시원을 뛰쳐나와 근처 병원으로 행인의 부축을 받고 옮겨졌다. 장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직접 신고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연세SK병원 원무팀 관계자 역시 “응급실로 실려 온 환자를 치료하는데 온 신경이 집중돼 있었다. 다른 상황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했다.

13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들은 연세SK병원과 영동세브란스병원, 차병원, 순천향병원 등 서울 시내 여러 병원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에 따라 사건의 심각성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지체됐다는 비난도 불거질 전망이다.

그렇다면 앞서 이씨가 119에 신고한 8시 45분이 고시원 참사와 관련된 최초 신고였을까. 바로 이 부분에서 사고 피해자들과 경찰 측의 입장이 엇갈린다. 피해자들은 김대영씨가 신고한 8시 20~30분이 정확한 신고 시각이며 구급대가 오기까지 적어도 30여분 이상 시간이 지체됐다고 믿고 있다.

반면 경찰은 언론에 공개한 사건일지를 통해 8시 45분 이후에 첫 신고를 받아 곧장 논현 지구대를 통해 출동 및 사건 진압을 총괄했다고 밝혔다.

결국 ‘30분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마지막 열쇠는 김대영씨의 선혈이 범벅된 총무실 내선전화기다. 김씨가 8시 30분 경 신고를 한 것이 사실이라면 경찰의 사건일지가 처음부터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문제는 해당 전화기와 관련된 112 신고내역을 피해자나 언론이 입수하는 데 적잖은 난관에 부딪쳤다는 점이다.

서울경찰청 생활안전과 곽모 경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신고 목록을 포함한 전화 통화 내역은 개인정보에 포함된다. 가입자 본인의 동의 없이는 공개가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경찰에 따르면 신고내역을 확인하기 위해선 몇 가지 서류가 필요하다.


사건의 열쇠, ‘피투성이 전화기’

먼저 민원 신청인의 신분증과 전화를 가입한 명의자 신분증, 동의서, 전화를 개통한 가입증명서 등을 모두 제출해야 한다.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빠지면 통화내역을 열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해자들의 속이 타들어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시원 주인의 이름으로 등록된 것으로 보이는 전화기의 통화 내역을 열람하기 위해서 불구속 입건된 조씨의 협조가 필수적인 것.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씨가 피해자들과 직접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씨는 경찰 조사에만 가끔 응할 뿐 피해자 가족이나 언론과의 접촉을 모두 피하고 있다. 기자가 서울 용산구로 되어있는 조씨의 현재 주소지로 찾아갔지만 역시 그를 만나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사건의 마지막 의혹을 풀 열쇠가 미궁 속에 갇힐 공산이 높아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본지가 협조를 요청한 서울경찰청 측 역시 “전화 가입자(고시원 주인)의 위임장을 받아오라”는 말만 반복 했다.

서울경찰청 홍보과의 정모 경위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법으로 지정돼 있는 이상 월권을 행할 수는 없다. 또 당시 사건 신고가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를 일일이 확인하고 싶으면 신고자를 모두 수소문해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 경위는 또 “자신의 말을 녹음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며 “녹취록이 보도되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경찰이 사건 의혹과 관련된 핵심적인 사안은 감추면서 기자의 입을 틀어막겠다는 식의, 오해의 소지가 높은 신경질적인 대응이었다.

한편 고시원 사건 피해자 모임은 변호사를 통해 고시원 주인과 경찰, 구청 등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할 뜻을 밝혔다. 사건은 1999년 씨랜드 화재 참사 등을 해결했던 안병희 변호사가 맡았다.

안 변호사는 “현재 사건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채집하고 있으며 조만간 원고를 누구로 할지 고민 중”이라면서 “단순히 피해자들의 말만 믿고 객관적인 자료 없이 소를 제기하는 것은 위험한 만큼 신중하게 사건을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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