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지지율 급전직하 즈음 온갖 ‘카더라 통신’ 난무
구포에서 열차 사고가 일어나더니 격포에서 여객선 사고가 이어졌다. 마포에서는 지하철 공사장에 가스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사고가 나는 곳은 ‘포’자로 끝나는 지명(地名)을 가진 곳이었다. 그런 와중에 소위 ‘카더라 통신’이 난무했다.
소문이 소문을 낳으면서 “이번에는 김포에서 비행기 사고가 난다" “다음 번에는 영등포에서 지하철 사고가 터진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나갔다. 사회가 어수선해지면서 대통령의 지지율도 급전직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고 행렬은 멀쩡하던 삼풍백화점이 어느 날 갑자기 내려앉으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김영삼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시기에 일어났던 조창호 소위의 귀환에 대한 얘기는 좀 소개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일련의 사고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의 하나가 성수대교 붕괴사건이었다.
멀쩡하던 다리가 하루아침에 중간이 끊어져 내리면서 수 십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묘책을 찾아야 했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더 큰 뉴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뉴스로 뉴스를 덮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탈북 국군포로였던 조창호 소위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사실 안기부는 애초부터 조창호 소위가 탈북하여 귀환을 시도하던 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하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뉴스로 뉴스를 덮는 안기부 공작
조 소위는 출신 집안이 괜찮았다. 서울과 미국에 사는 친지들이 그의 탈북을 돕고 있었다. 특히 조창호 소위의 조카가 중국 현지에까지 들어가 직접 조 소위를 동반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일보 사회부의 최모 기자였다. 정보기관이 해야 할 일을 조선일보가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수대교가 붕괴하자 안기부의 태도가 표변했다. 안기부 지휘부는 담당관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창호 소위를 살려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당초 조창호 소위 일행은 조그만 통통배를 이용해 서해바다를 건너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첫 번째 시도는 파도가 너무 높아 실패하고 되돌아갔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풍랑으로 인해 배가 실종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수산청의 어업지도선을 총 동원하여 서해를 이 잡듯이 뒤졌다. 수색작업은 수산청을 담당하던 최모 서기관이 주도했다.
총력을 기울여 수색한 끝에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사흘만인 일요일 오후에 조창호 소위를 구출해 낼 수 있었다. 정부는 즉각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환영식도 거창하게 베풀었다.
조 소위 집안에서는 북쪽에 남겨진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정부의 방침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국군포로 출신 탈북자 1호가 탄생한 것이다. 내막을 알고 보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후 조창호 소위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시절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몇 차례 워싱턴에까지 와서 북한의 참상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나는 인사나마 드리려 그의 숙소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끝내 그를 만나 보지는 못했다.
몇 년 전 그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한 많은 인생 대한민국에서의 그의 말년이 얼마나 보상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문민정권 시절에는 시국을 벗어나기 위해 임기응변의 땜질식 처방이 잦았다. 사건이 터지면 더 큰 사건을 만들어 뉴스로 뉴스를 덮으려 했다.
지난 97년 황장엽 선생의 망명사건도 전형적으로 그런 경우였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문민정권은 정권의 마지막 해를 시작하면서 노동법과 금융관계법을 날치기로 개정하려다 실패했다.
정국이 경색되면서 야당은 김현철 문제를 들추면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철 사건이 엉키면서 정권 자체가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황급히 정국을 전환할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황장엽 선생의 망명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 아래 급박하게 추진된 것이었다. 초보적인 공작 마인드가 있는 사람이라면 황 선생 같은 거물은 북측 깊숙이 심어두고 오래도록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 하다 보니 성급하게 허급지급 데려 온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황 선생님과 김덕홍 선생의 가족이 애꿎게 희생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정부가 황 선생과 김덕홍 선생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황 선생의 망명에 대해서는 월간중앙 2001년 10월, 11월호 ‘황장엽 망명 미스터리’ 제하의 기사 참조)
나는 우리 사회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 사회 전체가 얼마나 한심한 수준으로 타락해 있는지를 절감했다. 내가 본 우리 사회는 이미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건전한 윤리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상류층일수록 더 심했다. 대한민국의 상류층 가운데 건강한 가정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단정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 했다.
조창호 소위 탈북에 얽힌 속사정
지난 몇 년간 황우석, 신정아라는 두 명의 걸출한 스타가 나타나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우리 사회를 온몸으로 웅변해 보였는데 내가 본 90년대 중반의 한국 사회도 이미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정인을 거론해 좀 안됐지만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겠다.
텔레비전 화면에선 예의 바르고 인자한 이미지로 유명한 모 중견 아나운서는 룸살롱에만 가면 속된 말로 ‘개구신’이 된다고 했다. 룸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는 온갖 지저분한 짓을 스스럼없이 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어느 상갓집에서 술 취해 행패부리는 걸 내 눈으로도 본 적도 있었다. 지난 94년도에는 “소위 명문대 출신이 최초로 미스코리아에 선발됐다"고 온통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당선 후 “이제 우리 나라에도 지성을 겸비한 인물이 미스코리아로 뽑힐 때가 되었다"며 그럴 듯한 당선 소감까지 곁들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작 그녀 자신은 승마 특기생이었다. 아버지가 부산에서 부동산 갑부였다. 승마 특기생이라고 해서 우수한 지성을 갖추지 말란 법은 없지만 ‘글쎄다’ 싶었다.
그녀는 요즘도 텔레비전에서 자주 얼굴을 비치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내 눈에는 우리나라 미스코리아 선발이 그제나 이제나 언제나 문제가 아주 많은 것처럼 보인다.
<다음 호에 계속>
김기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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