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뛰어든 세상- ‘묻지 마 범죄’ 정신감정 해결사 만나다

“유영철과 정성현 등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사이코패스)의 전형을 보여준 경우였습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물론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나 아픔을 전혀 못 느끼는 냉혈한들이죠.”
끔찍한 살인마들과 1:1로 대면한 최상섭(59) 국립법무병원장은 ‘반사회적 인격장애는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는 불치병’이라고 토로했다.
‘보도방’ 종업원 등 여성과 노인 21명을 무참히 살해한 유영철(38)과 안양 초등생 유괴·살해범 정성현(39)이 거쳐 간 그곳. 바로 충남 공주에 위치한 국립법무병원 치료감호소다. 최근 6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7명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안긴 고시원 방화 살해범 정상진(31) 역시 현재 이곳에 수용돼 있다.
최근 불거진 ‘묻지 마 범죄’를 비롯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범죄 피의자들의 정신감정과 치료감호를 담당하는 국내 유일의 기관인 국립법무병원 치료감호소. 330000m²(약 10만평) 부지에 11개 병동, 총 760여명의 환자를 수용하는 대형 국립 병원인 이곳이 특별한 이유다.
공주터미널에서 계룡산 자락을 타고 20여분 정도를 더 들어가야 하는 국립법무병원은 취재진의 출입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철저히 베일에 싸인 치료감호소의 모습과 살인마들의 본성에 대한 최 원장의 생생한 경험담을 지상 중계한다.
일반적으로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졌을 때 사람들은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라는 말을 쉽게 한다.
특히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무차별 살인과 같은 ‘묻지 마 범죄’의 경우 범인들은 ‘정신이상자’의 꼬리표를 달기 일쑤다.
“사이코 패스와 정신병은 달라”
실제 정신분열증과 같은 정신병적 질환을 앓은 끝에 환각, 망상에 사로잡혀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상당하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가족이나 지인들을 상대로 한 면식범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게 최 원장의 설명이다. 즉, 최근 이슈화 되고 있는 ‘묻지 마 범죄’의 범인들은 정신병과 상관없는 인물들이 상당수라는 얘기다.
“정신병 때문에 폭력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1차적으로 발작이나 환각, 환청 등 정신병적 증상이 나타납니다. 또 범죄의 대상도 가족이나 이웃 같은 주변인에 국한되죠. 반면 흔히 ‘사이코패스’로 치부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의 경우 이런 정신병적 증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보통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자들입니다.”
희대의 살인마로 악명을 떨친 유영철이나 어린 초등학생 두 명을 무참하게 토막 살해한 정성현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한다.
남에게 끔찍한 고통과 피해를 주고도 정작 자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냉혈한. 또 죄책감과 자신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 상당히 둔감한 것이 사이코패스,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의 특징이다.
이들이 정신병자와 확실히 구분되는 것은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만큼의 사리 분별 능력과 형사책임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최근 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은 정성현의 ‘발뺌’이 먹히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4월 9시간에 걸쳐 정성현을 직접 면담한 최 원장은 직접 법정에 증인으로 나서 그의 유죄를 입증하기도 했다.
“정성현의 경우 본드를 흡입한 환각 상태에서 범행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같은 말을 뒷받침할 만한 행동의 일관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살인을 저지르고 시신을 유기하는 과정이 상당히 계획적이었기 때문에 심신미약으로 볼 수 없죠.”
사이코패스가 일반인과 비교되는 가장 극명한 차이는 지나친 ‘마이 웨이’(My way)다.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주변인을 지배하려는 특성이 강한 것.
또 정신적으로 고통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폭력이나 살인 등 범죄 행위를 일으키기 전에 정신과 의사를 찾아 치료를 받는 일도 없다.
“자신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의식, 치료에 대한 필요나 동기를 아예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혹 운이 좋아 가족들에 의해 입원하게 되도 문제는 끊이지 않습니다. 본인만의 세계가 너무 확고한 나머지 의사와 주변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거죠.”
이들은 일반적인 정신과 치료제나 면담으로도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병원 환경을 자신이 생각한 틀에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
“지나친 ‘마이 웨이’도 사이코패스”
“사회나 환경에 스스로가 적응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맞도록 제도와 틀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사이코패스입니다. 자신은 교정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주위 사람이나 환경을 지배하려는 마음이 아주 강하죠. 고정관념이 시멘트처럼 굳어버린 상태로 사물을 보는 시각 자체가 일반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게 사이코패스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최근 고시원에 불을 지른 뒤 도망치는 사람들을 난도질 한 ‘고시원 살인범’ 정상진의 경우는 어떨까. 일부 언론에 따르면 정씨는 ‘물병과 대화를 나누는 등’ 정신병적 기질을 충분히 갖고 있는 사람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최 원장의 진단 결과는 뜻밖이었다. 경찰의 의뢰를 받아 1개월 예정으로 정씨의 정신감정을 집도하고 있는 최 원장은 “아직 진행 중인 사항이라 정확히 확신하기는 어렵다”는 단서를 붙이면서도 “정상진은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를 직접 면담해본 결과 일반적인 반사회적 인격장애, 사이코패스의 징후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향군법 위반에 대한 벌금형 외에는 특별한 전과도 없었고 과거 정신병을 앓은 흔적도 없고요.”
최 원장에 따르면 흔히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는 절도나 사기 등 재산범 보다 폭력 전과를 가진 경우가 상당수다. 참을성이나 인내력이 없고 좌절감에 휩싸여 폭발할 때 폭력이나 살인 등 강력범죄를 저지른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상진의 경우 일반적인 반사회적 인격장애와는 양상이 달랐다는 게 최 원장의 설명이다.
“정씨는 부모로부터 관심과 사랑이 못 받고 컸다고 말하더군요. 자신감도 상당히 부족하고. 욱하는 성질보다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6명을 살해하고 7명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 ‘대량살상범’ 정상진의 범행 동기는 무엇일까. 그 답은 이달 말 정신감정이 마무리 되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립법무병원을 찾는 피의자의 수는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순간적인 충동에 의한 우발적 범죄와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묻지 마 범죄’가 늘고 있다는 반증이다.
지난해 국립법무병원이 실시한 정신감정 건수는 417건. 치료감호소가 문을 연 이래 최대 수치다. 그러나 법무병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건과 피의자들에 비하면 여전히 적다. 문제는 그나마도 극히 일부 피의자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간다는 점이다.
“경찰청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1년에 3300여건 정도의 기소사건이 발생하고 체포되는 피의자들이 약 1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1/3 가량인 3000여명 정도가 정신감정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417건이라는 검사 건수도 부족하죠.”
“교도소 내 치료 못 받는 정신이상 수감자만 900여 명”
범죄를 저지른 뒤 검사나 경찰에 의해 정신감정 요청을 받고 법무병원에 입소하는 피의자들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설명이다. 최 원장에 따르면 900명에 달하는 재소자들이 정신질환에 시달림에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경찰이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 정신이상 소견을 보일 경우 수사기관에서 직권으로 법무병원에 정신감정을 의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실형이 선고될 경우 꼼짝없이 교도소에 수감되는 게 고작이죠. 저희가 예상하기로는 약 900명 정도의 재소자들이 이런 상황에 빠져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도소 내에서 자해행위나 또 다른 폭력범죄에 노출 될 수 있죠. 일종의 ‘시한폭탄’과도 같은 상황입니다.”
불안과 불확실의 사회, 범죄자와 정신질환자의 이중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모인 그곳의 하루는 평온했다. 위기의 사회에서 한발짝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국립법무병원 치료감호소는
국내유일 정신질환 범법자 치료·수용 국립병원
“특채 출신 의사는 공무원 신분, 자부심 필요”
국립법무병원 치료감호소는 정신질환 범법자를 수용, 치료하는 정신병원의 기능을 가진 수용기관이자 법원·검찰·경찰로부터 형사피의자의 정신감정을 의뢰받아 수행하는 감정기관이다. 또 1987년 11월 18일 전공의 수련병원으로 지정돼 정신과 전공의와 정신보건간호사, 정신보건사회복지사 등 정신보건 전문요원의 교육·수련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약 21년 간 21명의 정신과 전문의를 배출했으며 현재 전공의 포함 21명의 정신과 의사와 88명의 간호사를 둔 국립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주요업무는 ①사회보호법에 의거하여 치료감호 선고를 받은 자의 수용·보호 및 치료 ②치료감호 업무 발전을 위한 조사·연구 ③법원, 검찰, 경찰로부터 정신감정을 의뢰받은 자에 대해 정신감정 실시 ④사회보호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위탁된 보호감호자 치료 등이다.
치료감호란 정신질환 및 약물중독 등으로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들을 시설에 수용하여 치료 및 교정·교화하며 형벌을 대체 또는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일종의 보안처분이다.
최 원장은 국내 법정신의학 전문가 1호로 지난 1991년부터 일반정신과장을 거쳐 20여년 가까이 법무병원에 헌신했다. 그는 “법무병원 소속 의사들은 법무부 산하 공무원 신분으로 군인이나 경찰 못지않은 자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공주=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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