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삼 육필수기 ‘나의 국정원 체험기’ 23
김기삼 육필수기 ‘나의 국정원 체험기’ 23
  • 김기삼  
  • 입력 2008-11-04 14:03
  • 승인 2008.11.04 14:03
  • 호수 758
  • 2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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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
이모 기자는 오 실장의 경복고 후배라 그런지 부속실로 뻔질나게 전화를 걸어 왔다. 주로 정치권 동향을 전달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생각할 때마다 ‘기자라는 사람이 저렇게 정보기관과 유착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한편으로는 ‘타고난 기자란 저런 사람을 말하는 게로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특히 김현철 관련 특종 기사를 여러 번 썼다. 당시 방송과의 강 모라는 젊은 수집관이 있었는데 그는 이모 기자의 대학교 후배였다. 수집관으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 요원이었다.

보통 수집관들은 하루에 두 세 페이지짜리 첩보 두 건을 쓰는 것도 힘들어 했는데 강 모 수집관은 하루에 대 여섯 페이지 분량의 첩보를 대 여섯 건씩이나 써 댔다. 강 모 수집관은 주로 이모 기자의 취재수첩을 그대로 베껴 첩보를 썼는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많았다.

정치과의 베테랑 수집관들은 한동안 이 젊은 수집관이 수집해 온 첩보를 확인하러 쫓아 다녀야 했다. 이모 기자는 인터넷 신문 대표 시절, 자신의 기자시절 취재 수첩을 다시 들추어 정치권의 지나간 일들에 대해 연재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비록 철 지난 얘기들이었지만 그의 연재물은 한결 같이 민감하고 흥미로운 소재들이었다.


안기부 수집관에 취재수첩 빌려준 기자는?

내용도 대체로 정확한 것이었다. 그러다 그는 10여 차례 연재를 하더니 갑자기 연재를 중단하곤 그 인터넷 신문을 떠났다. 나는 그가 연재를 중단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무슨 사연과 곡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취재수첩이 언젠가 책으로 나오면 재미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 실장은 언론계 인사들과 유대를 중요시했다. 언론사 사주 중에서도 특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주들과 가까웠다. 동아일보 사주가 해외로 나가면 해외 파견관들에게 특별히 지시하여 편의를 제공해 주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조선의 사주 일가들의 비리나 추문을 덮어주기도 했다.

심지어 오 실장은 한겨레 최학래 사장과도 친했다. 아마 같은 고대 출신이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짐작된다. 한 번은 오 실장이 상을 당했는데, 최 사장이 “밤늦도록 상가를 지켜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한겨레 젊은 기자가 긁어버릴지도 모르니 내가 상가를 지키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상갓집에 한겨레 사회부 기자가 몰래 취재를 와서 “권력 실세의 상갓집에 대한민국의 요인이 전부 다 몰려들었다"는 식의 기사가 나가지 않도록 사전에 조치하겠다는 의미였다. 한겨레도 알고 보면 위아래가 다른 콩가루 집안이었던 셈이다.

오 실장은 각 언론사의 편집국장이나 정치부장들 같은 간부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이들과는 정기적으로 자리를 만들었다. 모임에 나갈 때는 언제나 현금이 두둑이 든 가방을 가지고 나갔다. 소위 말해 촌지라고 하는 것이다. 촌지라고 하기보다는 뇌물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오 실장의 판공비는 대부분 기자들 촌지에 쓰인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안기부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다"라고 말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직접 보지 않아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한 번 나갈 때마다 수 천만 원은 들고 나가는 것 같았다.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한 사람에게 족히 수 백 만 원은 돌리는 것 같았다. 물론 기자들의 직위에 따라 촌지의 규모는 조금씩 달랐다.

이러한 기름칠이 효력을 발휘한 덕분인지 오 실장은 그 후 고비마다 언론의 도움을 받았다. 주요 언론들은 그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축소 보도하는 쪽으로 그를 숨겨 주었다. 김영삼 정권에서 오 실장이 했던 역할은 김대중 정권에서는 박지원씨가 그대로 이어 받았다. 특히 언론을 조지고 어르는 중책(?)을 짊어진 게 똑 같았다.

나는 언젠가 박지원씨를 도청한 미림팀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녹취록에서 박지원씨는, “지금 이 시간에도 오정소 XX가 우리를 도청하고 있을런지 모른다"고 떠들고 있었다. 사석에서의 그의 말은 공석에서보다 훨씬 더 거칠었다. 지난번 대북송금 특검에서 오정소 실장이 박지원에게 김영완을 소개했다고 밝혀졌다.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싸우면서 닮는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문민정권의 출범은 그야말로 창대했다. 애초에 문민정권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문민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사회 각 요소에 사정을 칼날을 들이 대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온 사회에 겁 없는 망나니의 칼춤이 어른거렸다.


“오정소, 박지원에 김영완 소개

군사정권 시절의 잔재를 청산한다면서 군대 내 사조직과 특정 인맥을 과감하게 잘라 냈다. 엘리트 장교가 쫓겨 나간 자리엔 권영해 같은 또 다른 부패한 인물들이 대신했다. 법조계와 교육계 등 사회 각 분야의 뿌리 깊은 고질병을 도려내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이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기득권층의 반발과 개혁세력을 준비부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물론 몇 가지 부분에서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민주화에 큰 진전을 이루어 냈다고 평가할만했다. 전격적인 금융실명제 실시와 공직자 재산 공개 같은 것들은 문민정권이 아니고서는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이었을 것이다.

문민정권 초기에는 이러한 개혁정책 덕분에 국민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다 정권이 둘째 해를 맞으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전국 각지에서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다.

마치 겨우내 얼어붙었던 축대가 봄이 되면서 무너져 내리는 형국이었다. 육-해-공뿐만 아니라 지하에서조차 연쇄 다발적으로 사고가 일어났다.

(다음 호에 계속)

김기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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