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배에 칼 꽂고 비웃던 살인마 얼굴, 잊을 수 없다”

비좁은 고시원 방에 불을 지른 뒤 도망치는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한 ‘고시원 악마’ 정상진(31). 그에 맞서 칼에 찔려 내장이 쏟아질 정도의 치명상을 입고도 혈투를 벌인 최후의 생존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난달 20일 벌어진 고시원 살육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김대영(29)씨는 <일요서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서울 한남동 순천향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 사건이 벌어진 지 엿새 만인 지난 10월 26일 겨우 의식을 되찾은 김씨는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김씨가 불의의 습격을 당한 것은 지난달 20일 오전 8시 20분 경. 알려진 정황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그는 살인마에게 걸려든 첫 번째 피해자이자 최후의 생존자인 셈이다. 그러나 김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뻔했다”며 쓰디쓴 눈물을 삼켰다. 만학의 꿈을 이뤄가던 가난한 스물아홉 청년에게 남은 것은 흉측한 상흔과 반복되는 악몽, 갚을 길 막막한 1000여만원에 달하는 병원비뿐이기 때문이다.
“배를 직격으로 두 번을 찔렸는데 칼을 뽑는 순간 내장이 ‘후루룩’ 쏟아져 나오더라고요. 한 손으로 상처를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고장 난 문고리에 매달려 버텼어요. 범인이 그 문을 열려고 발로 걷어차고 칼로 내리찍는데...‘이대로 죽는구나’ 싶었어요.”
8시 20분 ‘불이야’ 첫 번째 비명
지난 10월 29일 서울 순천향대병원 1인 병실에서 만난 김씨의 손과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 사흘 내내 악몽과 불안증세에 시달리고 있는 그가 기자에게 털어놓은 당시의 상황은 희대의 살인마를 소재로 한 한편의 공포영화나 다름없었다.
“불이야!!!”
2008년 10월 20일 오전 8시 20분 경. 참극은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외침으로 시작됐다. 서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아침 8시쯤 퇴근한 김씨는 모아둔 빨래를 세탁실에 넣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로 그때 ‘불이야!’라는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방문을 박차고 나온 김씨는 ㄷ자로 된 고시원 복도 반대편에서 새어나오는 뿌연 연기를 봤다. 고시원에 고용된 4명의 총무 중 분명 누군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할 시간이었음에도 그의 방과 마주보고 있는 총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김씨는 곧장 총무실에 놓인 소화기를 들어 안전핀을 뽑으려 했다.
허리를 숙인 채 소화기를 집어든 사이,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김씨의 왼쪽 배를 아래에서부터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 80kg이 넘는 탄탄한 체격의 김씨가 공중으로 붕 떠오를 만큼 엄청난 힘이었다. 검은색 옷에 고글과 랜턴으로 무장한 ‘살인마’ 정상진과 대면한 것이다.
소화기를 떨어트린 김씨는 순간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주먹은 정씨의 얼굴에 꽂혔지만 충분히 힘이 실리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곧바로 정씨의 두 번째 칼질이 반대쪽 배를 노리고 들어왔다. 깊숙이 박혔던 흉기를 뽑아든 순간 벌어진 상처에서 장기들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아프고 고통스럽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어요. 쏟아지는 장기를 손으로 막았는데 이걸 놓으면 그대로 죽는다는 생각밖에 안 나더라고요. 오른손으로 터진 배를 움켜쥐고 왼 주먹으로 범인 얼굴을 다시 한번 가격했죠.”
두 번째 공격은 제대로 먹힌 듯 했다. 건장한 김씨가 거세게 반항하자 정씨는 연기가 새어나오는 쪽 복도로 뛰기 시작했다. 치명상을 입은 김씨는 문이 열린 총무실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러나 아무리 잠금쇠를 눌러도 문고리가 잠기지 않았다. 문고리가 고장이 나 안에서 붙잡지 않으면 그냥 열려버리는 ‘있으나 마나한’ 바람막이에 불과했던 것.
“그 순간 범인과 눈이 마주쳤는데 내가 숨은 방으로 다시 뛰어오더라고요. 죽기 살기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어요. 놈은 문을 부수려고 발로 걷어차고 칼날로 내리치고... 얇은 문짝 하나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였죠.”
맨손으로 칼날을 막는 바람에 엄지손가락 인대와 신경이 완전히 끊어졌지만 김씨는 초인적인 힘으로 문고리를 붙잡고 버텼다. 피로 범벅이 된 총무실 문이 열리지 않자 정씨는 다른 사냥감을 찾아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도살당하고 있어요!”
살해위기를 넘긴 그가 찾은 것은 전화기였다. 총무실 내선 전화로 112를 누른 김씨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다급히 소리쳤다.
“살인사건입니다! 칼을 맞았어요. 논현동 1XX번지 D고시원 3층! 사람들이 도살당하고 있어요!”
김씨가 기억하는 신고 시간은 8시20~30분 사이. 김씨를 병원으로 이송한 응급구호일지에 따르면 중상을 입은 그가 현장에서 발견된 시간은 오전 9시4분이었다. 김씨의 주장대로라면 그는 무려 30분 가까이 맨 손으로 터지는 피와 장기를 막으며 죽음의 공포와 싸운 것이다.
“더 무서운 건 손에 힘이 빠져서 문고리를 놓쳤는데 그 열린 틈으로 범인이 어떤 여자분을 공격하는 걸 봤어요. 칼로 옆머리를 내리치는 걸 정면으로 봤는데 어떻게 손을 놓겠어요.”
김씨가 경찰과 구조대원을 기다리는 동안 그를 최악의 공포로 몰아넣은 사건. 몸을 숨긴 방 바로 앞에서 김씨는 또 다른 피해자의 살해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이미 과다출혈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살인마의 손에 도륙당하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게 최선이었다.
눈앞이 하얗게 새고 ‘이젠 죽었구나’ 싶었을 때 드디어 소방대원들이 김씨가 앉아있는 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김씨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목격한 구조대원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피를 철철 흘리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데 불씨 정리부터 하더라고요. 나는 몇 십 분을 유독가스 안에서 버텼는데. 나중에 두 명이 다가와서 제 팔을 떼어내고 일으키려고 하는 겁니다. 손을 떼면 그대로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을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가까스로 반대쪽 손을 들어 상처부위를 가리켰죠. 그제야 움켜쥔 손을 그대로 붕대로 고정해 들것에 실려 나올 수 있었어요.”
오전 9시 16분 경 응급실에 도착한 김씨는 손짓으로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간호사에게 그려준 뒤 정신을 잃었다. 곧장 수술실로 옮겨진 그는 쏟아져 나온 소장의 2/3와 간 일부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은 뒤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병원비 중간정산 해야 치료 해준다는데…”
최악의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은 천운(天運)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말을 기자에게 입버릇처럼 했다. 눈앞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극심한 정신적 충격, 경제적인 압박감이 ‘삼중고’로 그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소화기 들었을 때,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 그걸 범인 얼굴에 쐈어야 했어요. 그럼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을 텐데…. 이 병원에 저까지 5명이 실려 왔는데 그 중 4명이 죽었데요.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너무 죄송해요.”
죄책감과 함께 그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고 했다.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찾은 뒤 매일 눈만 감으면 살인마의 환영이 김씨를 괴롭혔다. 기자를 만나기 전날 밤엔 6층 병실에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는 게 그의 하소연이다.
“눈만 감으면 가위를 눌려요. 그 범인이 칼로 내 배를 쑤신 상태에서 칼 손잡이를 비트는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요. 날 보면서 비웃는 모습부터 뼈가 갈리는 그 고통까지 너무나도 생생해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어제는 도끼에 제가 난도질당하는 꿈을 꿨거든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 달 만 있으면 나이가 서른인데 너무 겁이나요.”
죄책감과 정신적 충격에 휩싸인 김씨에게 병원 측은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겼다. 그는 아침에 간호사가 자신에게 건네주고 갔다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가 사고를 당한 뒤부터 정산한 진료비 청구서였다.
수술비와 1주일간의 입원·치료비를 모두 합한 금액이 1500만원. 그 중 의료보험급여액을 빼고 김씨가 부담해야할 돈은 절반인 700여만원에 달했다. 최소한 1개월은 꼼짝없이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김씨에게 병원 측은 ‘치료비를 중간정산 해야 계속 치료해 주겠다’고 통보했다.
고시원 참사 희생자를 위한 모금액은 고스란히 중국동포에게 먼저 돌아갔다. 김씨와 같은 한국인 부상자가 받은 보상금은 관할 구청인 강남구청이 위로금조로 지급한 300만원이 전부인 상황. 김씨는 ‘살아있는 것이 한스럽다’며 울분을 삼켰다.
“아침에 간호사들이 와서 병원비 얘기를 하더라고요. 제가 뛰어내리고 싶지 안 그러겠어요. 최소한 한 달은 더 있어야 퇴원할 수 있는데 그냥 저보고 죽으라는 얘기죠. 병원비 못 내면 이거(수술봉합부위) 다 뽑고 그냥 나가야해요. 차라리 저한테 지금 칼 쥐어주고 찔러서 죽으라고 하는 게 나아요.”
어린시절 가난 탓에 다섯 식구가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김씨. ‘중졸’이라는 꼬리표가 준 설움을 씻기 위해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차였다. 그런 그에게 닥친 불행은 단순한 생활고 이상이다.
“우리나라가 참 안 좋네요. 중환자실에서 나오고 나서 TV뉴스를 봤어요. 중국동포들 합동 장례식 치르고, 보상금이 2천만원인가 나온다던데 ‘나는 뭔가’ 싶더라고요. 차라리 내가 죽으면 부모님께 짐이라도 덜어 드릴 텐데. 지금이라도 퇴원해서 서울역 노숙자라도 할까요?”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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