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Ⅰ오두환 기자] 정국이 혼란스럽다. 박근혜 대통령 비선조직을 둘러싼 논란 때문이다. 비선조직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숨은 실세’ ‘2인자’쯤 된다. 이들은 국정 조직 인선, 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박 대통령의 숨은 실세로는 정윤회 씨와 십상시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나 당사자들 모두 실세임을 부인하고 있다. 역대 정권에서도 ‘2인자’는 늘 있어 왔다. 하지만 결코 그들의 운명은 평탄치 않았다. 강력한 통치를 위해서는 결국 동고동락했던 대통령 스스로 자의반 타의반 그들을 내치거나 내쳐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통령’ ‘리틀 프레지던트’ ‘서대문 경무대’ 등으로 불려
정권 따라 다른 2인자 스타일…충신형·권력형·동지형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당시 정권의 2인자는 이기붕 전 국회의장이었다. 국무총리는 국가의전 서열 5위지만 조선시대로 따지면 영의정에 곧잘 비견된다.
영의정과 성격은 다르지만 이기붕 씨는 국가의전 서열 2위에 해당하는 국회의장직을 수행했다. 3대 국회에서 전·후반기 의장을 지낸 이기붕 씨는 이승만 정부 시절 국방부 장관, 서울특별시장, 국회의장을 지내면서 ‘서대문 경무대’라 불릴 정도로 이승만 대통령 다음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이기붕 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친아들을 양자로 내주면서까지 권력에 집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인자로서 권세를 누렸던 이기붕 씨는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 당선됐으나 부정선거로 밝혀지면서 4·19혁명을 촉발해 아들 이강석의 권총에 맞아 삶을 마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2인자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었다. 별명이 ‘제갈조조’일 만큼 머리가 좋았다. 국가재건회의 공보실장, 청와대 비서실장을 거치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고, 1970년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하며 정점에 섰다. 이 전 중앙정보부장은 1972년 유신헌법 선포 후 체제 확립을 위해 노력을 다했지만 ‘김대중 납치사건’ 등 무리하게 충성심을 발휘하다가 결국 해임 당했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외에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는 2인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김종필 전 총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이자 5·16 군사정변 동지로 초대 중앙정보부장, 공화당 의장 등을 지내며 권력을 누렸지만 2인자로서 끊임없이 견제에 시달렸다. 1960년대 말 김 전 총리가 당시 김대중·김영삼·이철승 씨 등과 함께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됐기 때문이다. 김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심한 부침을 겪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곁을 떠나지는 않았다. 김 전 총리는 정계를 은퇴하며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2인자는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다. 5공화국에서 청와대 경호실장,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냈다. 전 전 대통령의 충직한 심복으로 대통령을 향한 충성심이 아주 높았다고 평가 받았다.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의 충성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과거 5공 청문회장에서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각하가 구속되는 것은 막겠다”고 말하는 등 충성심과 의리를 과시했다. 1993년 이른바 ‘용팔이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자, 책임을 지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2인자는 노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 동생인 박철언 전 의원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이자 6공화국의 최고 실세였다. 노태우정권 시절 ‘LP’(리틀 프레지던트), ‘황태자’로 불릴 정도로 권력을 장악했다. 청와대 정책보좌관,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지내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대북특사 역할을 할 정도로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지만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권력싸움에서 패배하면서 추락했다. 지금은 매주 지방에 내려가 노모를 보살피며 글을 쓰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2인자는 바로 아들 김현철 씨였다. 아버지 호인 ‘거산’에 빗대어 ‘소산’이라는 별칭으로 통했다. 김현철 씨는 막후에서 인사와 공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 전 대통령이 어지간한 문제는 “현철이와 상의하라”고 했을 정도여서 ‘소통령’으로 불렸다. 하지만 YS정권 말기 각종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감옥신세를 졌다. 이후 수차례 정치적 재기를 시도했으나 여의도 입성에 실패하는 등 시련을 겪었다. 최근에는 김 전 대통령을 병원에서 극진히 간호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2인자로는 ‘김대중의 분신’으로 불리는 동교동계 맏형인 권노갑 전의원이었다. 목포상고 4년 선배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시련기에도 늘 곁을 지키며 조직과 자금을 관리했다. 권 전 의원은 자신의 묘비에 ‘김대중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 권노갑’ 17자만 새겨지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DJ정권 하에서 권력의 실세로 통했지만 2000년 자신이 사실상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준 쇄신파 의원들이 일으킨 새천년민주당 정풍운동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2인자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었다. 2002년 대선 승리 이후 줄곧 청와대에서 대통령 보좌에만 힘썼다. 실세로 주목받았지만 외부 노출을 꺼려 청와대 근무 시절 자신의 고교 동창조차도 만나지 않은 일은 유명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2인자는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이었다. 이명박정부의 최대 창업공신으로 2008년 18대 공천을 좌지우지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다. 그러나 18대 총선에서 문국현 전 의원에게 패한 뒤 미국으로 떠났다. 그 사이 2인자의 자리는 이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과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차지했다.
이기붕, 이후락, 장세동, 권노갑 씨는 충신형으로 불린다. 그만큼 자신의 대통령을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하지만 이들의 끝은 평탄치 않았다. 온몸을 던졌던 만큼 시련도 컸다.
박철언, 김현철, 이재오씨는 충신보다는 권력형 2인자로 불린다. 자신들의 대통령을 보위 보좌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반면 김종필과 문재인은 동지형이다. 조용히 옆에서 묵묵히 자신들의 역할을 해 내며 대통령의 과업 완수를 도왔다.
정권별로 2인자들의 스타일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끝이 평화롭지 못한 것은 똑같다. 현 정권이든 이후 정권에서든 늘 정치공세의 타켓이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을 위해서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의든 타의든 2인자들은 이런 운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는 많은 정치적 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내가 살기 위해서 정적을 제거해야 하고 때로는 내가 정적이 돼 희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2인자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싼 숨은 실세들의 싸움도 결국은 2인자들의 싸움이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박근혜 대통령은 2인자를 키우지 않기로 유명하다는 점이다.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을 통해 박 대통령은 철저히 학습했다. 2인자는 필요하지만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번 숨은 실세들의 싸움에서도 결국 누가 죽고 살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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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