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발 730억 사채, 연이율 580% 늪
일본 발 730억 사채, 연이율 580% 늪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8-10-22 14:36
  • 승인 2008.10.22 14:36
  • 호수 756
  • 3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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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눈물도 없는 ‘쩐의 폭력’ 중소기업 울렸다

경찰이 고 안재환 사건으로 불거진 불법사채업자들의 횡포를 바로잡겠다며 사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계 자금이 국내 불법 사채시장으로 흘러들어 1천여 개에 달하는 중소기업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연 580%에 달하는 살인적인 이자율로 이들이 굴린 사채자금은 약 730억원에 달한다. 국내 단일 대부업체 규모로는 역대 최대 금액이다.

한국인 사장 권모(34)씨를 비롯해 30여명에 달하는 일당들은 경찰에 붙잡히거나 불구속 입건됐다. 그러나 두목 격인 일본인 전주(錢主) I씨(39)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30여대의 대포폰과 6곳의 거처를 동원해 치밀하게 숨어버린 그가 일본 폭력조직(야쿠자)의 일원이라는 진술이 나온 터라 당국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한국에 진출한 야쿠자들은 화폐위조나 마약 밀매 등 범죄 뿐 아니라 부동산과 사채시장을 주무르며 국내 실물경제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야쿠자와 국내 사채업계의 연결고리가 드러날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서울 영등포에서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던 이모(56)씨는 지난해 5월 회사 문을 닫아야할 위기에 몰렸다. 골머리를 앓던 차에 마침 ‘무담보 신용대출’을 해준다는 E-메일 한통이 그에게 도착한 게 악연의 시작이었다.

당장 부도를 막기위해 이씨는 강남 역삼동의 한 대부업체로부터 하루 이자율 1%에 어음을 담보로 1000만원을 빌렸다.

가까스로 폐업 위기를 넘겼지만 담보로 맡긴 어음 결제일이 닥치자 ‘지옥’이 시작됐다.

대부업체 직원들은 이씨의 매장으로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씨를 더욱 곤경에 밀어 넣은 것은 연 580%에 달하는 ‘죽음의 이자’였다.

조금만 여유를 달라는 이씨의 말에 일당들은 “죽고 싶어 환장했냐” “어디에 묻히고 싶냐”며 협박까지 일삼았다. 벼랑 끝에 몰린 이씨는 마침 자신에게 접근해 온 또 다른 대부업체를 통해 3500만원을 빌려 빚을 청산했다.


피해자 속여 두 번씩 등쳐

그러나 이것이 그의 실수였다. 각각 ‘대성’ ‘나라’라는 이름을 가진 두개의 업체는 한 명의 전주가 운영하는 같은 회사였다. 일당들이 이씨를 먹이로 두 번씩이나 돈놀이를 한 것이다.

이씨가 일당에게 빌린 돈은 4500만원이었지만 불과 1년 만에 빚은 2억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불법사채의 늪이 그의 목을 졸랐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전자부품회사를 운영하는 홍모(50)씨도 똑같은 꼴을 당했다. 홍씨는 이들에게 980만원짜리 어음을 써주고 880만원을 빌렸다가 20일 만에 280만원 이자를 얹어 1160만원을 갚아야 했다.

일당은 홍씨가 써준 어음을 돌리겠다고 협박해 이자와 원급을 갈취했다.

‘무담보 신용대출’이라던 말은 새빨간 거짓말. 사실은 어음을 미끼로 한 ‘담보대출’이었던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이들의 고리 자금을 사용한 업체들 중 일부는 높은 이자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부도가 났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지난 13일 불법 대부업체를 운영한 혐의로 바지사장 권씨를 구속하고 영업점 지점장 전모(29)씨를 비롯한 23명의 직원을 불구속 입건했다. 또 달아난 한국인 영업사원 15명을 추적 중이다. 문제는 일당의 두목이자 730억이란 거금을 굴린 전주 I씨의 행방이다.

700억이 넘는 자금이 정말 야쿠자의 재산인지, 일본으로 송금된 수익의 규모는 얼마인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I씨를 반드시 조사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I씨는 마치 경찰 수사를 미리 예감하기라도 한 듯 철저한 은폐술로 자신을 감췄다.

한국에서 30여대에 달하는 대포폰과 6곳이 넘는 거처를 마련해 생활한 것으로 알려진 터라 일각에서는 이미 그가 수사망을 벗어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권씨를 사장으로 내세워 3개의 사채 사무실을 관리하도록 지시한 I씨는 이들을 모두 점조직으로 운영했다.

‘대성’ ‘나라’ ‘대영’ 등의 이름을 걸었던 불법 사채 사무실 직원들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까지도 다른 사무실의 존재조차 몰랐던 것으로 전해졌다.


I씨, 야쿠자 비호 받나

간부인 지부장 급 인물들도 권씨하고만 일을 해왔을 뿐 I씨와 직접 접촉한 적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국내에서 I씨와 자주 접촉했던 인물들을 상대로 일대일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지만 그를 검거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금융당국과 업계에 따르면 국내에 등록된 대부업체 수는 1만7000여개에 달하며 전체 자금규모는 18조원 정도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일본에서 흘러들어온 자금은 8조원 정도로 전체 시장의 40% 이상을 일본계가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 일본계 대부업체가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 업계에 따르면 이들은 일본의 이자율 상한선이 20%대로 떨어지자 당시 이자제한이 없던 한국에서 활로를 개척했다.

국내에서도 2002년 대부업법이 제정돼 2007년 연 49%로 이자 상한선이 결정됐지만 낮은 금리를 무기로 대규모 자금동원력을 갖춘 일본계 업체에게 한국은 매력적인 시장이다.

상위 5대 업체 가운데 리드코프 등 한국계 업체의 영업이익과 규모는 러시앤캐시, 산와머니 등 일본계 업체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실정이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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