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류들이 득세한 문민정부 온갖 찌라시(정보지) 난무
부속실에서 작성하던 정치권 동향보고서 이외에 방송과에서는 언론계 동향 보고서를 만들었다. 서모 방송과 기획관이 매주 토요일 오후에 이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사실 언론 동향보고서는 신문과에서 맡아야 제격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모 방송과장이 먼저 그 일을 차지했다. 말이 나온 김에 이모 과장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겠다. 그도 내가 국정원에서 본 ‘별종’ 중의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산에 집을 두고 서울에서 호텔생활을 하고 있었다. 회사 일로 가정까지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일에 대한 열정과 아이디어는 풍부했지만 인간성은 ‘별로’였다. 그는 윗사람에게는 확실히 아부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철저히 군림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부산지부에서 정보과장을 오래 했지만, 사실은 전라도 사람이었다. 출신이 경상도인지 전라도인지 헷갈리는(?) 사람을 우리는 은어로 ‘얼룩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전형적인 얼룩이였다. 언론계 동향보고서 덕택에 김영삼 정권에서 동기들보다 먼저 승진했다. 그러다 정권이 바뀌면서 더욱 승승장구했다.
그는 대구지부장으로 영전하여 소위 ‘밀라노 프로젝트’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대구 지역의 섬유산업을 발전시키는 방안이었다.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때 이태리의 섬유 패션 산업과 협력하는 다양한 방안이 정부 차원에서 구상되어 추진되기도 했다.
이원종 수석 정치권·언론계 쥐락펴락
그 후 그는 자신의 기반이었던 부산지부장을 지냈다. 부산지부장 시절에 일본의 혼마 골프채를 밀수하는 데 국정원 직원이 연루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이 터지자 그는 전 직원들을 소집하여 밤샘 근무를 시키고 윤리헌장을 외우게 하는 등 코미디 같은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는 국내정보 부서장이 되기를 원했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우리가 작성한 주간동향 ‘야매보고서’는 위력이 대단했다. 이원종 수석은 우리가 보낸 정치권과 언론계 동향보고서 덕택에(물론 다른 정보 소스도 있었겠지만)정계와 언론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어 보았다.
그는 이 보고서를 양손에 쥐고 정치권과 언론계를 완벽하게 쥐락펴락했다. 신문 기자들은 이 수석이 어떻게 그렇게 언론계 동향을 잘 아는지? 신통해 했다. 자신들이 몰래 장관들과 만난 사실을 이 수석이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는 데 대해 놀라는 눈치들이었다.
나는 가끔 내 자신이 내가 쓴 야매 보고서의 위력을 보고 놀랄 때가 있었다. 가령 장관급 인사의 비리에 대해 보고서를 올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목이 날아 가는 것을 내 눈으로 볼 때가 있었다.
나는 ‘7급 공무원에 불과한 내가 장관의 모가지를 자르는 일을 해도 괜찮은 건가?’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다. 이러다 ‘내가 너무 교만해 지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속실에 근무하는 덕분에 매일 수 천만 원 어치의 정보를 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일을 너무 오래할 것은 아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문민정권의 화려한 비상과 허무한 결말이 “김영삼 대통령의 개인적인 성향에 많은 원인이 있다"고 판단하는 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들의 가려운 곳을 간파하고 충족시킬 줄 아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지나치게 여론에 신경을 썼다. 언론의 보도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직 무능력이 드러나지 않았던 정권 초기에는 이러한 성향 덕택에 국민들로부터 초유의 인기를 누렸다. 대통령 자신이 “지나치게 높은 지지율이 오히려 부담스럽다"고 할 정도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논리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에 늘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조깅은 열심히 했다.
김덕룡 의원 한직으로 밀려난 이유
그러나 자신의 머리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정작 머리 좋은 사람을 찾아 쓰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기용했던 수많은 인사들은 김현철을 통해 소개된 ‘이류’인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어쩌면 체질적으로 ‘일류’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즉흥적인 사람이었다. 모든 일을 정치적인 ‘감’에 의존하여 처리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핵심 측근들도 대체로 하나 같이 ‘감’에 의존하는 사람들이었다. 오정소 차장 같은 사람이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감’은 예리하고 순발력은 뛰어났지만 논리와 일관성은 부족했다. 골방에서 끼리끼리 작당하는 데는 능했으나 광장에서 백년대계를 논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문민정권은 기본이 안 된 사람들이 끼리끼리 작당하면서 망가졌다. 그 중심에는 항상 김현철이라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현철의 국정농단이 심해질수록 김영삼 정권은 더욱 심각하게 망가져 갔다. 내가 대정실에 근무할 당시 이미 김현철 씨의 국정개입은 너무 과도한 수준에 이르렀다.
일개 사인(私人)에 불과한 30대 젊은이가 한 국가의 모든 인사를 주무르다시피 했다. 개각 때마다 기판국에서 5배수의 추천 명단을 올렸는데 이와 별도로 대정실에서도 따로 5배수를 올렸다.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보고서는 당연히 김현철 씨에게 가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김현철 씨에게 비판적인 자세를 보인 사람은 가차없이 잘려 나갔다.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도 그런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덕룡 의원도, “현철을 유학 보내라"고 건의했다가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다.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김기삼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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