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이범희 기자] 영화 ‘신세계’를 보면 ‘골드문그룹’이라는 회사가 등장한다. 번듯한 중견 기업의 모습을 갖추고 있고, 말끔한 신사복 차림의 기업가 모습이다. 사내 변호사도 고용할 정도다.
그러나 실상은 조직폭력배(일명 조폭)다. 다만 이권다툼에 관여하더라도 주먹보다는 법망을 교묘히 이용해 차익을 챙긴다. 과거에는 조폭에게 상상하기 힘들었던 기업 인수합병 등이 이들의 주된 비즈니스다.
그런데 이 일이 영화 속 내용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이 충격적이다. 최근 대검찰청이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 적발한 폭력조직 중엔 불법 선물시장 개설과 HTS(홈트레이딩시스템)등을 통해 주가조작 등으로 사세를 확장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2조원대 지하경제를 움직이는 신흥 세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칼·각목 대신 태블릿PC…신사복 입는 조폭 등장
조직 개체수 줄었지만 기업 M&A 손 댈 만큼 지능화
그동안 조폭이라 하면 주먹 깨나 쓰는 사내들로 함축됐었다. 영화에서도 조폭들은 주먹싸움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처럼 묘사됐다. 하지만 그들이 진화했다. 오늘날의 조폭은 ‘제3세대 조폭' 또는 ‘기업형 조폭'으로 불린다. 과거와 달리 조직이 체계적이며 기업화 돼 겉으로 봐서는 조폭 조직인지 일반조직인지 구분이 힘들다. 여기에 새로운 트렌드가 더해졌다.
유흥주점이나 불법게임장, 성매매업소 등 불법영업장 운영뿐만 아니라 건설업, 사채업, 유통업, 연예기획사 등 합법을 가장한 사업에도 진출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식시장, 회사인수 합병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기업형태에 이르지는 않지만 보험범죄, 인터넷 도박사이트 운영 등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개입하고 있다.
검찰에 딱 걸려
일부 젊은 조폭들은 인터넷 등을 이용한 정보기술(IT) 범죄에도 손을 대는 모양이다. 지난해 10월에는 서울에서 1900억원대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한 조폭 56명이 검거됐다.
검찰청 관계자는 “최근 조폭은 폭력과 갈취 등에서 벗어나 합법을 가장한 기업형으로 변모했으며 인터넷을 활용한 범죄 등으로 지능화하는 추세다"고 뀌띔한다.
뿐만 아니라 최근 검찰 발표에 따르면 대전 지역의 ‘유성온천파'와 ‘반도파'의 사세 확장도 주목된다. 이들은 2012년부터 1223억 원대의 불법 선물 시장을 개설해 200억 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코스피200과 연동된 HTS를 개발했고, 증권 전문가에게 리베이트를 주고 투자자를 모으는 전문화된 수법까지 동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익금은 조직원을 대표로 세워 유령 법인을 만든 뒤 법인 명의로 대포통장을 만들어 현금화했다. 이들이 지난 2월 사이트를 폐쇄하기 전까지 형성한 불법 선물시장은 1223억원, 운영 수익은 196억원에 달했다.
불법 행위에 가담한 선물옵션 전문가는 24명, 동원된 대포통장은 176개였다. 검찰은 범죄에 가담한 조직원 등 50명을 적발해 10명을 구속 기소하고 32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사채업을 하다가 상장사를 인수해 회삿돈을 가로챈 사례도 있다. ‘목포오거리파’는 조직원이 사채업을 하면서 상장회사를 인수해 채권 22억6000만 원과 전환사채발행 자금 60억 원 등 회삿돈 94억 원을 횡령하기도 했다.
청주 지역 폭력조직인 ‘파라다이스파’ 조직원들은 석유업계에 진출해 950억 원대 무자료 세금계산서를 유통해 세금을 포탈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구 지역 3대 조폭 중 하나인 ‘동구연합파’는 불법 게임장을 열어 조직 운영 자금을 조달하다가 적발됐고, 전국구인 ‘범서방파’ 수괴급 조직원은 마카오 카지노와 손잡고 원정 도박을 한 한국인에게 ‘롤링 칩’으로 불리는 도박 자금을 제공하다가 검거됐다.
382억원 상당 불법 스포츠토토를 주도한 성남 폭력조직 ‘국제마피아파’, 전직 경찰관과 유착해 1500억원 상당의 도박 사이트 ‘황금어장’을 운영한 ‘경산인규파’도 있었다.
검찰은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지난 10개월간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다. 그 결과 대검찰청 강력부(부장 윤갑근 검사장)는 지난 2월 개최된 ‘전국 조폭전담 부장검사·검사·수사관 전체회의’ 조직폭력배, 사행행위사범 등 총 952명을 인지해 이중 345명을 구속했다고 지난 2일 밝혔다.
또 총 2조18억원 상당의 불법금융, 사행시장 등 지하경제를 적발하고 898억원 상당의 범죄수익환수 조치를 취하는 등 성과를 거뒀다고 덧붙였다.
검찰 관계자는 “최근 범죄 수법이 지능화된 새로운 형태의 폭력조직이 나타남에 따라 금융 시장에서 불법영업을 하거나 사행 산업에 진출해 지하경제를 확장한 이들을 적발하는 데 주력한 것"이라고 전한다.
한편 대검은 앞으로도 제3세대 조폭들에 대한 지속적인 단속을 통해 지하경제와 폭력 활동을 적발할 방침이다.
김진태 검찰 총장도 취임 당시 “최근 조폭은 합법적인 사업가처럼 활동하면서 경제질서를 어지럽히고 거대한 지하경제를 형성하고 있다"며 “총력을 기울여 단속함으로써 활동 기반을 와해하고 범죄수익을 환수해 국가 재정에도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기업형 3세대 조폭 등장으로 정·재계 유착이 심화되면서 조폭이 지방선거에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며 동태를 예의주시해 선거개입을 사전에 받고 수사 과정에서는 인권침해가 없도록 주의해 달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