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강진 청자박물관 감정서③
서울 중앙 지방 검찰청과 서초경찰서에 출두하고, 이어 종로경찰서에서도 강진청자 감정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또 감사원에서 전화가 왔다. 자신을 특별 감찰국 모 과장인데 본인에게 출두해 조사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내가 “감사원에서 공직자도 아닌데 조사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우리는 특별 조사국이라 누구라도 조사할 수 있다. 특별히 서울시내 모처에 감사원 특별 조사국분실로 출두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나이도 많고 바쁘니 미루거나 못가겠다고 했다. 그러니 조사국 모 과장과 또 한분이 같이 와서 강진 청자 구입문제로 두 시간 이상 심문하고 조사를 마치고 돌아갔고 지금까지 아무 대답이 없다.
이 문제는 몇 년 동안 인터넷신문, 지역방송, 텔레비전에서 수차례 다뤄졌다. 그때마다 본인의 이름이 발언되고, 부도덕하고 고미술 값을 여러 사람과 서로 짜고 부풀려 국고손실을 가져오게 하는 비리사단의 사단장이라고 보도가 됐다. 참으로 낯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웠다. 어디 가서 “나는 그런 일을 한 일도 없고, 되도록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평생을 나름대로 노력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소연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왜 이런 사단이 벌어졌을까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아직도 상주출신 국회의원인 모 의원께서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국사 다난하고 정말 나라와 겨레와 자신의 지역을 발전 위해서 하실 일이 태산같이 많으실 터인데 말이다. 본인은 평생 문화재와 살다. 어떻게든 애초부터 부정에 관여하지 않으려, 정직과 명예를 위해 살려고 노력했다.
강진청자 감정건은 본인의 학자적 지식과 양식과 소신에 의한 것이었기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그리고 젊은 시절 20여 년간 강진청자 조사, 발굴 유적 보존 박물관 건립에 참여하고 자문했다. 강진 청자행사에 미력이나마 일조를 해왔다. 감정에 참여한 다른 학자들도 모두 강진 청자보존과 강진발전에 일조를 아끼지 않고 부끄럼 없이 살아온 학자들이다. 그런데 검찰에 ‘업무상 배임 및 사기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을 당했다. 생전 처음 당한일이라 가슴이 뛰고 머리가 혼미했다.
바라옵건대 상주출신 국회의원인 모 의원. 저희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감히 한마디 올리옵니다. 굽어 살려 주시옵소서.
경복궁과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문제
조선은 1392년 개경에서 건국했다. 이후 지금 서울을 국도로 정하고 거기 종묘사직과 정궁 경복궁을 세웠다. 이로써 ‘나라의 근간이 되는 것이 무엇이다’라는 의지와 외형을 갖추게 됐다.
조선 최초의 정궁인 경복궁은 북악과 북한산이 주산이 되고 배경이 된다. 서쪽에는 인왕산, 동쪽에는 낙산, 남쪽에는 남산이 있고, 남산 바로 남쪽에 한강이 흘렀다. 한강 남쪽 저 넘어에는 관악산이 있다. 산하가 참으로 수려한 서울의 명당이 바로 경복궁이다. 그래서 오백년 사직을 연면히 이어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
왜국은 1592년 임진년에 평화로운 우리나라에 갑자기 대군을 몰고 쳐들어왔다.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파죽지세로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하고 피바다로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민심을 극도의 공포와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러다 정말 나라가 망하면 어찌할까하는 크나큰 좌절감을 심어주기 위해 15만 평에 꽉 들어찬 경복궁 전각에 불을 질렀다. 몇 주일간 서울의 밤하늘은 악마의 혀처럼 붉게 물들었고 서울 장안도 연기와 재로 뒤 덮혔다.
왜군은 계속해서 전국의 민가, 사찰, 향교 등을 무자비하게 불 지르고 약탈했다. 사람을 마구 죽이고 또 수십 만 명을 잡아다 노예로 팔았다. 백자 등 도자장인과 인쇄 장인 등 수많은 기술 인력과 의약인과 지식인들을 잡아다가 저들의 문화발전에 이용했다. 수많은 문화재를 훼손하고 약탈해 갔다.
그 이후에도 왜국은 계속 우리나라를 다시 침략하려고 갖은 계획을 면밀하고 악랄하게 만들어 갔다. 국력을 크게 신장하고 세계 각국의 선진기술을 습득했다. 서양과 친교를 맺어 환심을 사고 군비를 대폭 개량 증강해 조선 재침략의 기반을 든든히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임진왜란 300여년 후인 1800년 말부터 왜국은 다시 우리나라를 사기와 술수 협박 공갈과 무력으로 침략했다. 이후 40년, 왜국의 잔인하고 혹독한 침략 하에서 살아남은 자는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청화백자 운용문준
18세기 전반 높이: 57.5㎝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우리나라에는 항아리가 많아서 항아리의 나라라고 일컬어진다. 어렸을 때 보면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여러 가지 백자 항아리가 있었다. 백자에 코발트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 항아리, 동화로 그림을 그린 동화백자 항아리, 철화로 그림을 그린 철화백자 항아리가 있고 일제 침략시대도 여러 가지 항아리가 많았고 지금까지 널리 쓰이는 오지항아리 질항아리 등 참으로 우리주변엔 맨 항아리 천지였다.
항아리는 둥근 것은 항아리(缸)라하고 이 항아리 같이 훌쭉하게 키가 큰 것은 준(樽··尊)이라고 하는 것이 바른 명칭이다. 40년쯤 전 까지는 「충」이라고도 해 용그림 준을 용충이라고 불렀다.
동양에서 용은 영물로 갖은 조화를 다 부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 위에 권위와 위엄이 있어 황제와 왕을 상징하기도 했고, 바다의 용왕님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우리네 동네이름·산이름·사람이름에 용자가 참 많이 들어간다.
이 용준은 입이 직립했고, 좀 높고 어깨에서 몸체까지가 풍만하며 그 선이 원만하다. 허리 아래에서부터 많이 훌쭉해져서 입보다 훨씬 좁은 굽에 이른다.
준의 입에 선당초문, 어깨 위에 여의두문 저 아래 굽 위에 3단으로 연판문, 여의두문, 화문대가 있는데 이들을 종속문이라 한다. 주문양은 운용문인데 용은 입을 벌리고 안경을 쓴 것 같은 두 눈에 화염 같은 눈썹을 하고 머리갈기가 뒷머리에서 앞으로 뻗쳤다. 발톱은 다섯인데 곡괭이 같고 등 갈기에 가시가 돋아나고 두 발에서 기가 솟아 머리 뒤와 등 뒤까지 뻗치고 있다. 이 준은 오조(발톱이다섯)용으로 궁중에서 의식 때 사용하던 매우 귀한 준이다.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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