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없다”…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감
서금회냐 청와대 실세냐…힘겨루기 추측도
애초 연임이 유력시되던 이순우 우리은행장은 이광구 부행장(사진)의 내정설에 끝내 자리를 비워줬다. 그것도 이 행장이 이 부행장과 막역한 사이인 가운데 흘러나온 설은 두 사람의 사이까지도 위태롭게 만들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이 행장은 민영화를 끝까지 수행할 적임자로 연임이 기정사실화돼 있었다. 새 행장이 선임되더라도 매각 이후에는 자칫 6개월~1년 만에 물러나야 할 자리였던 탓도 컸다. 비록 지난달 매각에서도 무산됐던 민영화지만 완수하겠다는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던 이 행장이다.
하지만 후보군에 있지도 않던 이 부행장이 급부상하면서 판세가 바뀌었다. 금융위원회가 당초 차기 행장 후보로 추천한 리스트는 청와대에 가서 뒤집혔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동문이자 서강금융인모임(서금회) 출신인 이 부행장이 이름을 올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이 행장은 지난 1일 돌연 연임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다음 날인 2일 우리은행 행장추천위원회는 부랴부랴 이 부행장을 정식으로 후보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5일에는 이 부행장을 포함한 세 후보의 면접을 진행하고 바로 행장을 선임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논란이 되자 이 부행장은 서금회가 금융인 모임일 뿐이며 맡은 직책도 없다면서 억울함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 부행장이 행장 자리에 올라서면서 금융권에 대한 서금회의 영향력은 한층 더 공고해질 요량이다.
타 기관들도 비슷
무시 당한 금융위
일각에서는 우리은행장 선임은 서금회 선이 아니라 더 윗선인 청와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금융권, 특히 은행권에서는 행장에 대한 간섭이 감초처럼 있어 왔다.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금융위 등 금융당국 선에서 그쳤으나 가끔 청와대의 입김이 미치기도 했다.
이번 우리은행의 경우에도 다소 의문이 가는 면이 있다. 금융위가 선정한 리스트가 뒤집혔다는 점에서 사실상 금융위도 무시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는 금융위지만 보다 힘이 센 누군가가 개입한 데 대해 반론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금융권에서는 이를 두고 금융당국보다 더 윗선인 청와대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다시 1990년대로 돌아간 것만 같은 이러한 행태에 금융권 관계자들은 한숨을 거두지 못하고 상황이다.
이는 최근 은행연합회장 선임이나 대우증권 사장 선출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던 과정이다. 하영구 전 씨티은행장은 금융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결국 차기 은행연합회장으로 선임됐다. 하 회장은 신제윤 금융위원장과 씨티은행 부행장이었던 조윤선 청와대 정무수석과 절친한 사이인 것이 알려지면서 금융당국과 청와대 중 어느 쪽의 줄인지가 도마 위에 올랐다.
홍성국 대우증권 사장 내정자 역시 유력한 전 후보를 제치고 급부상했다는 점에서 우리은행장 선임과 닮은꼴을 제공했다. 서금회인 홍 내정자는 공채 출신임에도 현재 대우증권의 주인인 산업은행장이 서강대 출신인 홍기택 산은금융지주 회장이라는 점에서 구설수에 올랐다. 조기 레임덕을 앞둔 정부가 연이 닿는 인사들을 금융권 요직에 무분별하게 앉힌다는 불평까지 흘러나왔다.
앞서 KB금융의 경우에는 이러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통 내부 출신을 뽑았다. 그 유명한 KB 사태를 겪은 만큼 회장 선임에 있어 더없이 신중할 수밖에 없던 KB였다. 이때 낙마한 것이 현 은행연합회장인 하 회장이다. 그런 탓에 KB금융은 LIG손해보험 인수 승인 지연에는 이 역시 한몫 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서금회 논란이 일 때만 해도 반복되는 대통령 학연 줄대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이보다 더한 청와대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면서 “우리은행장 선임 과정에서 정점을 찍은 이 같은 행태는 국내 선진금융의 길이 요원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나영 기자 nykim@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