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살인’ 카페 만들자 의뢰 봇물

돈만 주면 살인도 마다않는다? 현금 수 백 만원과 함께 살인청부를 받고 치밀하게 실행에 옮긴 20대와 이를 부탁한 여성 의뢰인이 줄줄이 철창신세를 지게 됐다. 청주 흥덕경찰서는 지난 18일 애정문제로 직장상사의 부인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회사원 김모(28)여인에 대해 살인교사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또 김 여인의 청부를 받고 이모(36·여)씨와 이씨의 쌍둥이 아들(12) 등 세 명에게 흉기를 휘두른 오모(22)씨에 대해서도 강도살인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 여인은 2006년 입사한 뒤 직속상사인 김모(41)씨에게 반해 최근 교제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이 같은 일을 꾸몄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김 여인이 오씨에게 살인을 의뢰한 뒤 두 차례에 걸쳐 건넨 돈은 700만원. 하지만 오씨가 돈을 받은 뒤에도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자 김 여인은 사례금을 10억원으로 올려 오씨를 자극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의 수사결과 발표가 끝났지만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있다. 평범한 회사원인 김 여인이 과연 오씨에게 사례금으로 제시한 10억원을 줄 능력이 있었느냐는 게 핵심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김 여인이 피해자를 죽인 뒤 보험금이나 유산 등을 노린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김 여인과 상사 김씨의 관계가 단순한 짝사랑인지, 실제 두 사람이 연인관계를 유지했었는지도 경찰이 풀어야할 숙제다.
청부업자에 사례금 10억 내걸어
김씨 집에 미리 숨어들어 부인 이씨와 12살 난 쌍둥이 형제를 수차례 찌른 범인은 오씨지만 모든 것을 지휘한 사령관은 따로 있었다. 바로 살인을 의뢰한 김 여인이다. 김 여인은 범행을 위해 상사의 집 열쇠를 몰래 훔쳐 복사한 뒤 오씨에게 넘겨줄 만큼 적극적이었다.
오씨는 바로 이 열쇠를 이용해 김씨의 아파트에 손쉽게 침입할 수 있었다. 제 집에 숨어든 살인미수범의 손에 모자(母子)가 고스란히 떨어진 건 모두 김 여인의 계략 때문이었던 것이다.
김 여인이 ‘연적’을 없애기 위해 수소문에 나선 것은 지난달 초. ‘살인업자’라는 아이디로 포털사이트에 카페를 운영 중인 오씨에게 한 통의 쪽지가 도착했다. 쪽지는 ‘600만원을 입금할 테니 짜증나는 직장상사의 부인을 해치워 달라’는 내용이었다.
지난 2월 전역한 뒤 운영하던 온라인 쇼핑몰이 실패해 돈이 궁했던 오씨는 김 여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살인은커녕 절도 전과조차 없던 오씨는 당초 돈만 받고 연락을 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중순 선수금 명목으로 400만원을 받아 챙긴 그가 차일피일 일을 마루는 사이 일은 점점 더 꼬여갔다.
“왜 빨리 일을 시작하지 않느냐”며 닦달하던 김 여인이 급기야 “살인청부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실을 경찰에 알리겠다”며 오씨를 협박하고 나선 것. 채찍과 함께 “일을 성공시키면 사례금으로 10억을 입금해 주겠다”는 당근까지 선사한 의뢰인 성화에 오씨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오씨는 이달 초 2~3번에 걸쳐 김씨의 아파트 주위를 서성이며 범행 장소를 물색하는 등 살인준비에 돌입했다. 마침내 지난 8일 복사한 키로 피해자의 집에 침입한 뒤 외출했다 돌아온 김씨의 부인과 쌍둥이 아들을 등 뒤에서 덮친 오씨 부엌칼에 수차례 찔린 세 모자가 거실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자 오씨는 피해자들이 숨진 것으로 오해했다.
오씨는 그 길로 안방에 있던 시계와 금팔찌 등 귀금속 3점을 주머니에 넣고 유유히 현장을 떠났다. 단순 강도 사건으로 위장하라는 김 여인의 조언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피해자들이 목숨을 건지면서 이들의 계획은 결정타를 맞게 됐다. 병원으로 옮겨진 부인 이씨와 두 아들은 응급 수술을 받은 뒤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고 곧바로 경찰에 도움을 청했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이씨는 순간 짚이는 것이 있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얼마 전 집으로 걸려온 낯선 남자의 전화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당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계좌로 돈을 입금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장난전화라고 생각했지만 워낙 충격적인 내용이었기에 이씨는 남자가 불러준 계좌번호를 메모해뒀고 경찰이 이를 토대로 오씨의 신원을 밝히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청부살인을 계획하면서 그 흔한 ‘대포통장’하나 마련하지 않은 오씨는 전형적인 ‘초짜’에 불구했던 것이다.
미리 구입해 둔 승용차로 현장을 빠져나온 오씨는 범행 하루 뒤 김 여인으로부터 수고비조로 300만원을 더 받아냈다. 이후 숨어 지낼 원룸을 얻는 등 도피 준비에 열을 올린 그였지만 경찰의 대응이 좀 더 빨랐다.
“당신 죽이라는 명령 받았다”
경찰은 계좌추적으로 알아낸 오씨의 주소와 아파트 승강기 CCTV 화면을 토대로 곧바로 탐문수사에 나섰다. 오씨는 범행 6일 만인 지난 14일 대구의 한 노래방에서 붙잡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오씨가 검거된 이상 의뢰인 김 여인 역시 무사할 수 없었다. 경찰은 같은 날 밤 청주에 있는 김 여인의 집을 급습해 김 여인을 붙잡았다.
한편 오씨는 경찰 조사에서 “호기심에 살인청부 사이트를 만들었지만 정말 의뢰가 들어올 줄은 몰랐다. 돈이 궁한데 김 여인이 워낙에 거액을 제시해 어쩔 수 없이 범행을 저지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사이트를 개설한 지 며칠 만에 적지 않은 살인 의뢰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또다른 의뢰를 실행에 옮겼는지 오씨의 여죄를 추궁하고 있다.
생면부지 남에게 살인을 권하는 사회. 이 시대의 씁쓸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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