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처럼 우리나라의 진보정당은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특히 최근의 야권 발(發) 정계개편론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인위적으로 일으켰던 집권당의 해체에 이은 신당 창당 과정을 떠 올리게 한다.
노무현 정권이 막 들어선 2003년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의 화두는 ‘참여’와 ‘개혁’이었다. 공직 선거 공천 과정에서의 국민 참여형 경선, 지구당 폐지, 지역구도 타파 등이 정당 혁신 방안으로 제기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원래 기존의 새천년민주당을 통해 정치혁신에 나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내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심했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을 껍데기만 남긴 채 빠져나와 열린우리당을 새로 창당했다. ‘노무현이즘’을 정치권 차원에서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열린우리당에는 우선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김근태·강봉균·이해찬·정세균·원혜영 의원 등 모두 35명이 참여했다. 여기에 개혁국민정당에 소속돼 있던 김원웅·유시민 의원이 가세했다.
뿐만 아니라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서도 5명의 현역 의원이 열린우리당에 동참했다. 이우재·이부영·김부겸·안영근·김영춘 의원이다. 당시 네티즌들은 이들의 정치개혁 의지를 높이 평가해 ‘독수리 5형제’라고 불렀다. 우주의 침략자로 부터 지구를 지켜내는 만화영화 주인공들에 비유한 애칭이었다.
정치개혁을 기치로 야심차게 뭉친 이들은 2004년 1월 11일 임시 전당대회를 통해 정동영 의원을 첫 당의장(현재의 당 대표)으로 선출했다. 김근태 의원은 첫 원내대표가 됐다. 전당대회 이전까지는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밀려 3위였지만 단숨에 1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곧바로 시련기를 맞았다. 같은 해 3월 9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열린우리당은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3월 12일 탄핵소추안이 통과됐다.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연합한 결과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수행은 정지됐다. 대통령직은 고건 국무총리가 대행했다. 하지만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안이 기각됨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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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은 탄핵 역풍을 타고 2004년 총선을 통해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여당이 됐다.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 과거사법 등 4대 개혁 입법의 처리를 추진했다. 그러나 야당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2005년에는 한나라당에 연정을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지역주의 타파를 대연정의 명분으로 내걸었으나 도리어 개혁진영의 분열만 초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2007년 대선 직전에는 지지도가 바닥을 쳤다. 그러자 새천년민주당에서 당명을 변경한 민주당과의 합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급기야 통합파 의원들이 집단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었다. 이 때 여당의 국회 과반이 무너졌다. 결국 열린우리당은 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하고 2008년 2월엔 민주당과 합쳐 통합민주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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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성 언론인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