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된 금융실명제법이 지난달 29일 시행됐다. 차명계좌로 금융거래하다 걸리면 금융 실소유주와 함께 이름을 빌려준 사람, 은행 담당자까지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이번 법 시행으로 그동안 반쪽짜리 ‘금융실명제’라는 오명을 벗게될지도 주목된다. 이미 시중 자금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세무당국의 숨 죽였던 돈 찾기 움직임도 발빠르다.
기업 불법자금, 고액자산가 돈 흐름 추적
집에 쌓인 현금, 경제에 어떤 영향 미칠까
시중에 떠돌던 부유층 자금이 과세와 처벌 대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꼬리를 감추고 있다. 은행 계좌에서 고액 예금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눈에 띈다.
새정치민주연합 민병두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6월부터 10월까지 10개 은행(국민·하나·신한·우리·외환·씨티·SC·농협·산업·기업은행)의 잔액 1억원 이상 개인계좌에서 인출된 돈은 484조5000여억 원이다. 은행에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정상적인 행위이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89조원 가까이 더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심상치 않다.
한 은행 관계자는 “금융실명제 개정안 시행 직전 증여세 감면 한도인 5000만원 이상의 자녀 명의 예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객 문의가 많이 들어왔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이렇게 빠져나간 일부 자산가들의 뭉칫돈이 비과세보험, 금 등 세금을 피할 수 있는 금융상품으로 옮겨가는 추세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하다.
삼성, 한화, 교보생명 등 3대 생명보험사의 비과세 저축성보험 초회 보험료와 일시납 연금액은 8월 2651억 원에서 9월 2823억 원, 10월 3526억원 등으로 빠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또 금거래소에서 1㎏당 5000만 원 수준에 판매되고 있는 골드바 또한 지난 1월 68㎏에서 지난달 132㎏까지 뛰었다. 특히 4월 59㎏ 수준이었던 판매량은 금융실명제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5월 94㎏으로 두 배 가량 급증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들 돈의 흐름은 다행이다. 수면 위에 떠 있기에 조사가 가능하다. 하지만 수면 아래로 가라 앉는 돈이 문제다.
자꾸 행적을 감추고 있는 5만원권도 아마 대부분 고액 자산가의 안방 금고에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법소득을 마늘밭에 5만원권으로 묻어놓았던 과거 사례에서 보듯이 땅바닥에 묻어놓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최근의 몇몇 비자금 사건에서도 5만원 권으로 뇌물 거래를 시도하다 적발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났다. 한동안 종적을 감춘 구권화폐가 최근 강남 일대에서 다시 활개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최근 전직 고위 공직자나 대기업 총수가 합의에 의한 차명 거래를 악용해 재산을 은닉해 온 정황이 발견돼 검찰 수사를 받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이뤄지고 있다.
음지로 더 내려갈까
문제는 이런 식으로 재산을 숨겨 놓았다가 상속세나 증여세를 한 푼도 물지 않고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재산을 물려주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더욱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고액자산가들의 자산이 세금을 피해 파악하기 어려운 곳으로 흘러갈 경우 그 피해를 서민들이 지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지하경제 양성화 취지로 귀금속과 금에 대해 대대적인 조치가 취해졌지만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종로보석도매상이었다.
시중에 금의 흐름이 없다보니 물량확보가 어려워 공급과 수요가 맞지 않아 줄도산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비싼 가격 탓에 금을 구입하지 못한 소비자들이 발을 동동구르는 일도 발생했다. 세무당국도 숨은 돈 찾기에 혈안이다. 정부가 세수 확보에 혈안이 된 터라 더욱 고삐를 죌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금융실명제법 강화로 은행 계좌에서 돌아다니던 정상 자금이 그늘로 숨어들면서 오히려 세금 탈루를 부추기고 ‘검은 거래’에 쓰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곤란하다"며“법의 당초 취지도 지하경제를 양성화함으로써 세수를 늘리자는 뜻이었다. 금융당국은 자금 흐름을 예의 주시하면서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후속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