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의 달인 ‘황 본좌’ 잡혔다
전화 6통으로 단 3시간 만에 수 백 만원의 ‘고수익’을 올린 보이스피싱의 ‘달인’이 경찰에 붙잡혔다. 부산 남부경찰서는 지난 15일 지난 5월부터 5차례에 걸쳐 상인들을 속여 고급 등산용품과 현금을 빼돌린 혐의로 황모(37)씨를 붙잡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자신을 ‘XX대 교수’로 포장한 뒤 영세상인과 학과 조교를 교묘하게 엮어 돈과 물건을 운반하는 심부름꾼으로 부린 황씨. 그의 수법은 특이하다 못해 ‘본좌’의 경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피해자들을 전화 한통으로 리모컨처럼 부린 ‘황 본좌’의 범죄 일지 속으로 들어가 봤다.황씨의 철칙은 절대 휴대전화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용자 추적이 쉽지 않은 공중전화 박스는 황씨가 먹잇감을 고른 뒤 피해자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몸을 숨기는 은신처로도 손색이 없었다.
지난 10일 낮 1시 30분 경 부산 남구 K대학 근처를 배회하던 황씨는 공중전화로 울산의 한 등산용품점에 전화를 걸었다. 황씨가 등산용품점을 고른 이유는 비교적 값이 비싼데다 직거래를 통해 물건을 현금화하는 과정이 쉬운 까닭이었다.
공중전화만 사용하는 치밀함
그는 등산용품점 주인 최모(47)씨에게 자신을 ‘K대 공학부 김모 교수’라 소개했다. 황씨는 “동료 교수 15명이 산악회를 조직해 1인당 200만원 어치씩 용품을 구입할 예정”이라며 “1명 분 견본을 4시 10분까지 학과 사무실로 가져오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최씨 입장에서는 반가운 전화일 수밖에 없었다. 경기가 나빠져 가게 매출이 곤두박질친 가운데 들어온 단체 주문은 훌륭한 미끼였다.
최씨와 통화를 마친 황씨는 곧장 K대 공학부 학과사무실에 두 번째 전화를 걸었다.
황씨는 조교 우모(25)씨에게 “대기업 특별채용 면접에 자네를 추천하려는데 관련 서류가 필요해 학교에 들어가는 길이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중요한 손님 두 분이 오실 테니 정중하게 대접해달라”고 지시했다.
우씨 역시 실제 재직 중인 김 교수를 사칭하며 대기업 취업 추천까지 약속하는 황씨의 자작극에 완전히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황씨가 세 번째로 전화를 건 곳은 K대 인근의 치킨 집. 그는 치킨집 주인 김모(57)씨에게 “내일 학교 행사에 쓸 통닭 15마리를 주문하려 하니 4시 반 쯤 학과사무실에 와서 미리 돈을 받아가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약속한 오후 4시가 되자 황씨는 학과사무실로 네 번째 전화를 걸었다. 그는 조교 우씨에게 “등산용품을 들고 온 손님에게 물건을 받아 치킨집에서 사람이 오면 건네주라”한 뒤 “사무실에 온 최씨를 바꿔달라”고 시켰다.
전화를 받은 최씨에게는 “급한 일이 생겨 다른 곳에 있으니 근처 B대학으로 돈을 받으러 오고 물건은 조교에게 맡기라”고 말하고 황씨는 전화를 끊었다. ‘교수님’의 말을 철썩 같이 믿은 최씨가 B대학으로 용품 값을 받으러 간 사이 황씨는 치킨집으로 다섯 번째 전화를 걸었다. “지금 바빠서 사무실에
없으니 조교가 주는 등산용품을 받아 K대 부근 서점으로 갖다 달라”고 부탁한 것.
김씨가 조교에게 용품을 받아 서점 앞에 나타나자 황씨는 김씨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기다려도 오지 않아 학교로 들어왔다”고 둘러댔다. “곧 다시 나가봐야 하니 가방은 서점 건물 엘리베이터 광고 간판에 숨겨두고 학교로 돈을 받으러 오라”며 여섯 번째 통화를 마친 황씨는 단 3시간여 만에 200만원 어치 등산 용품을 고스란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심부름꾼 전락한 피해자
황씨의 기막힌 사기 행각은 대형 한정식당에도 고스란히 먹혀들었다. 대구로 무대를 옮긴 그는 모 대학교 부근 공중전화를 이용, 한 한식당에 전화를 걸어 “내일부터 4일 동안 학술 세미나가 열리는데 교수 132명의 회식비 750만원을 1천만원권 수표로 미리 결제하겠다. 거스름돈 250만원을 준비해두라”고 말했다. 황씨는 이때도 치킨집 배달원을 이용해 이 돈을 빼돌려 유흥비로 탕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사결과 그는 2개월 동안 같은 수법으로 모두 5곳의 업체로부터 등산용품 79점과 현금 등 1천650만원 상당의 금품을 가로챈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황 본좌’의 기막힌 사기 행각은 200만원 어치 물건값을 내놓으라는 최씨와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조교 우씨의 신고로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경찰은 용의자가 사용한 것으로 드러난 공중전화 근처에서 잠복한 끝에 또 다른 범죄 행각에 나선 황씨를 현장에서 붙잡은 것.
경찰 관계자는 “사회적 지도층인 대학교수를 사칭하는 바람에 피해자들이 쉽게 속아 넘어갔다”며 “업주들은 처음 거래하는 사람이 대량 주문을 한 뒤 결제를 미루는 등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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