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연재-김기삼 육필수기 ‘나의 국정원 체험기’⑧
독점연재-김기삼 육필수기 ‘나의 국정원 체험기’⑧
  • 사회부 기자
  • 입력 2008-07-22 16:21
  • 승인 2008.07.22 16:21
  • 호수 743
  • 2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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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기들은 남자가 100명, 여자가 20명이었다. (한 해 정규과정의 인원을 밝히는 것은 인원 보안을 이유로 국정원에서 좋아하지 않을 일이다. 나는 이런 정도의 정보는 공개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40명씩 세 개 반으로 나뉘어졌다. 나는 A반 17번이었다.


추억의 병아리색 임시 명찰

우리는 정식 신분증 대신 노란 색의 임시명찰을 지급받았다. 노란 색은 병아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동기들 가운데서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다. 재수와 휴학으로 인해 입사가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보다도 나이가 더 많은 동기들도 더러 있었다.

나이 편차가 좀 있다 보니 동기들끼리 언어 문제가 불편한 경우가 있었다. 같은 입사동기라면 서로 대등하게 대해야 하는데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벌써 성인이 된 후 입사한 탓에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같은 동기라도 학교 선후배의 관계에 있기도 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사회관계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경우에도 동기 중에 고등하교 3년 후배가 있었다. 그래서 동기들 간이라도 나이 차이가 좀 나면 서로 존댓말을 썼다.

정규과정 교육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피교육생 신분이란 게 다 그렇지만 나이 들어서 통제된 생활을 강요당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옥훈련 같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 몇 주가 지나자 퇴사하겠다고 나서는 친구들이 생겼다. 제임스본드를 꿈꾸고 들어왔는데, 막상 겪어 보면 논산훈련소에 재입소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나도 처음 세 달은 무척 견디기 힘들었다. 전혀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한겨울의 훈련이라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모두 곤색 유니폼 양복을 입고 다녔다. 이동할 때는 언제나 줄을 맞추어 걸어야 했다. 청사 내에서 선배 직원들을 마주치기라도 하게 되면, 저 멀리에서부터, “안녕하십니까?" 하고 큰 소리로 인사하도록 교육받았다.

교육과정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이었다. 하루 일과는 대개 아침 6시부터 시작된다. 한 겨울의 아침 6시는 아직 캄캄한 새벽이었다. 기상나팔은 없지만, 대신 방송실에서 보내주는 기상 음악소리에 잠을 깼다.

기상 음악 선정은 학생회장이 했다. 대개 경쾌한 음악 위주로 골라 틀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짓궂은 동기 녀석이 “철의 노동자"를 트는 바람에 우리 모두가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양지관 앞에서 점호부터 한다. 점호가 끝나면 청사 내에서 2Km 정도 구보를 한다. 구보가 끝나면 샤워를 하고 청소와 수업준비를 한다. 아침을 먹고 9시부터 수업이 시작된다. 수업은 보통 하루 6시간 정도 진행된다. 수업이 끝나면 대개 한 시간 정도 합기도를 배운다.

이렇게 하여 하루 일과가 끝나는 날은 아주 운이 좋은 날이다. 정식 교과 과정이 끝나는 시간부터 정작 어려운 시간이 시작된다. 군대에서 내무반 생활이 더 어려운 것처럼. 보통은 일과가 끝나고 양지관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도 여러 가지 통제된 생활이 이어진다.


훈육관 별명 ‘육꽈니’에 얽힌 일화

저녁을 먹고 나서 또다시 단체 구보를 한다. 2Km 정도 하고 끝나면 아주 운이 좋은 날이다. 양지관에는 다목적실이라고 불리는 강당이 있다. 매일 밤마다 여러가지 목적을 가진 다양한 집합 행사가 열린다. 다목적실 집합이 끝나면 또 다시 청소하고 정리하고 취침점호라는 성가신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끝나야 비로소 하루 일과가 마무리된다.

비록 통제된 생활이긴 했지만 양지관 생활 중에 그나마 여유가 있는 시간이 저녁 시간이었다. 물론 이 때에도 완전히 자기만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은 낮 시간에 정식으로 받기 어려운 교육을 밤 시간에 보충하는 식이었다.

교육내용도 가지가지였다. 어떤 때에는 선배들이 위문한답시고 찾아와서 자신들의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외부에서 강사를 초빙해 사교댄스나 에티켓 같은 것을 강연할 때도 있었다. 차력사나 기(氣)치료사를 초청하여 강의를 듣기도 했다.

언젠가 한 번은 관상전문가를 초빙하기도 했다. 그는 사람의 관상을 여러 가지로 나누면서, 그 중에서 좋지 못한 얼굴을 “악완지상" 이라 했다. 이 강의를 들은 후, 우리는 훈육관의 별명을 ‘악완이’라고 짓게 되었다. 우리를 괴롭히는 훈육관에게 그런 식으로라도 보복하는 심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우리끼리는 훈육관을 ‘아과니’라거나 ‘육꽈니’라고 불렀다. ‘육꽈니’는 물론 훈육관을 줄여서 비하해 부른 말이었다.

양지관 생활 중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런 일 중의 하나가 취침 점호였다. 취침 점호는 논산훈련소에서보다 더 철저하고 까다롭게 했다. 점호가 시작되면 훈육관은 각 방의 청소상태나 사물정돈 상태부터 철저히 점검했다. 점호 시 번호와 성명을 복창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런데 그 복창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양지관이 아주 떠나갈 듯이 고함을 질러야 했다. 나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이 시절을 회상할 때면 저 멀리 복도 끝에서 “51번 xxx"라고 소리치던 친구의 고함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점호를 하다 갑자기 집합이 걸리는 수가 종종 있었다. 집합이 걸리면, 옛날 선배들은 추운 겨울날에도 팬티 바람으로 양지 못으로 뛰어 들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다행히 그 정도로 험악하게 시달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여자 동기들 덕택인 것 같았다. 그래도 꽤나 힘들게 했다. 그나마 구타나 가혹행위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신입부원의 정신 무장을 위해 행해졌다.

(다음 호에 계속)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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