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Ⅰ오두환 기자] 보이스피싱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김미영 팀장’이다. 우리나라 국민 중 대다수가 ‘김미영 팀장’ 이름으로 온 스팸문자를 받았을 정도로 ‘김미영’이라는 이름은 보이스피싱 사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오죽하면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이름이 등장할까. 최근 이 가상의 ‘김미영 팀장’을 만들어낸 보이스피싱 조직이 검찰에 적발됐다. [일요서울]에서는 이들 조직의 범죄 형태를 철저히 분석해 봤다.
범죄 수익금, 총책·인출책 각각 30%씩 챙겨
1인당 최대 1억 2000만 원까지 뜯어내기도
광주지검 형사2부는 지난 19일 저축은행을 가장한 콜센터를 해외에 차린 뒤 대출해줄 것처럼 속여 거액을 챙긴 혐의(사기 등)로 박모(42)씨 등 보이스피싱 조직원 53명을 입건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 중 해외로 도피한 총책 박씨 등 21명을 지명수배했다. 박씨는 중국·필리핀 등지에 콜센터를 차린 뒤 2011년 11월부터 2000여 명으로부터 40억 원을 뜯어낸 혐의다.
검찰은 또한 자금관리책으로 활동한 박씨의 친동생(39) 등 26명을 구속 기소하는 한편 간부급 조직원들의 수배 상황을 알려주고 1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경찰관 김모(41)씨 등 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검찰은 이들의 통장 입출금 내역과 범행 일람표, 피해자들의 진술 등을 종합한 결과 피해액이 400억원, 피해자가 수만명에 달해 현재까지 적발된 보이스피싱 조직 중 최대 규모라고 설명했다.
유능한 경찰에서
가짜 증거 만들다 해임
피해액 400억 원, 조직원 100여 명에 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보이스피싱 조직의 총책은 알고보니 보이스피싱 범인을 잡는 데 앞장섰던 전직 경찰관 박씨였다. 박씨는 보이스피싱 문자 메시지의 상징 격인 ‘김미영 팀장’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박씨는 원래 아주 유능한 경찰관이었다. 1995년 순경으로 임용된 뒤 각종 사건을 처리하며 경사로 특진했다. 이후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에서 전화사기 사건을 잇달아 해결하면서 간부인 경위로 또 특진했다. 그러다 경찰에 임용된 지 13년 만인 2008년 형사 처벌을 받을 처지에 놓인 지인에게 가짜 증거를 만들어 준 게 들통나 불구속 기소된 뒤 해임됐다.
해임된 뒤 박씨는 직장을 구했지만 쉽지 않았다. 1년가량을 국내에서 사업을 구상했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 과거 자신이 처벌했던 전화사기범의 제안을 받고 2010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박씨는 처음 소액결제 음란전화 서비스 사기를 벌였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넘어
베트남·필리핀 진출
중국 칭다오로 건너간 그는 기존의 방식으로 고객을 모으는 데 한계를 느끼던 중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가공의 인물인 ‘김미영 팀장’을 내세워 대규모 문자 메시지를 발송키로 한 것이다.
이후 박씨는 불법 개인정보 유통업자들에게서 수집한 휴대전화 번호에 ‘김미영 팀장’으로 시작하는 문자 메시지를 무차별 발송하기 시작했다. 고객이 늘자 조직원도 100여 명으로 늘렸다. 주로 중국동포를 이용한 기존의 보이스피싱과 달리 철저하게 내국인들로 조직을 꾸렸다. 중국동포의 어눌한 발음으론 범행이 어렵다고 판단해서다.
조직원 중엔 전직 광고모델과 전직 프로야구 선수, 연예인 매니저, 유흥업계 종사자, 조직폭력배 등이 껴 있으며 부부·형제·동서 등 친인척이 함께 범행에 가담하기도 했다. 전직 광고모델은 조직원 교육을 담당했다. 이들 조직은 중국을 넘어 2012년 5월 베트남, 10월 필리핀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갔다. 수사과정중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직원들은 공공연히 박씨를 ‘다거(큰형님)’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박씨는 대포통장팀과 현금인출팀 등을 점조직 형태로 운영하고 범행 때는 가명을 사용하는 철저함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사이버수사를 맡았을 때 수사한 피의자 3명을 조직원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대출 거부자 명단 구매해
맞춤형 사기극 준비
박씨는 사기활동을 위해 중국 해커들로부터 국내 저축은행 12곳의 대출 거부자 명단을 사들였다. 한 건당 최고 5만원을 지불했다. 대출이 거부된 피해자들만 노리는 ‘맞춤형 사기극’을 준비한 것이다. 피해자들은 대출이 거부됐다가 다시 대출을 해주겠다는 전화를 받으니 당연히 의심 없이 순순히 범행에 응했다.
특히 돈을 보내도록 유도하는 전화 상담사역할을 과거 박씨 자신이 수사했던 직업소개소 사장을 통해 한국 내 술집 종업원들을 시켰다.
당시에 이런 전화는 중국 옌벤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이 거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지만 이때부터 처음으로 한국인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피해자는 눈덩이처럼 불게 됐다.
범행 수법도 아주 치밀했다. 중국과 필리핀 등에 ‘콜센터’를 차린 일명 유인팀은 감쪽같이 저축은행 상담원으로 변신해 대출을 거절당한 당사자들에게 “다시 심사해보니 대출이 가능하다”며 접근했다.
그리고 대출 승인을 위한 보증서 발급비용과 인지세 명목(2.8%)으로 돈을 받아 챙겼다. 급전이 필요한 피해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돈을 송금했다.
보이스피싱 일당은 다음날 이번에는 ‘00저축은행 심사팀’이라며 전화를 걸었다. “금감원으로부터 공문을 받았다”며 피해자의 과거 단기연체 사실까지 언급하면서 “연체패턴보유자로 분류돼 보증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며 또 다시 돈을 요구했다.
보증보험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원금과 이자를 포함한 월 납입 금액의 1년분을 넣어야 하지만 6개월로 조정 요청을 했다며 피해자들을 현혹했다. 대출금이 1000만 원인 고객에게는 이 같은 방법으로 140여만 원을 받아 챙겼다.
박씨 조직은 1인당 수만 원에서 많게는 1억2000만 원까지 뜯어내기도 했다. 이렇게 2만여 명에게 400억 원 정도를 뜯어냈다. 이들에게 속아 4000만 원을 뜯긴 50대 피해자는 음독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저축은행인 것처럼 앞자리가 1588이나 1666 등인 번호를 사용해 콜센터와 계좌를 가장했다. 보이스피싱을 의심하는 피해자들에게는 여신금융협회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은 저축은행 상담 직원들의 사진을 이용해 위조한 신분증 사본을 팩스로 보내 주기도 했다.
박씨 지명수배
30억대 빌딩 매입하기도
박씨와 동생은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가족 명의로 30억 원대 빌딩을 사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개별 피해금액이 3억원 미만이어서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규제 대상이 될 수 없어 환수 조치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직원들은 검찰에서 “저축은행을 사칭한 국내 보이스피싱 전화의 70%는 우리가 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검찰은 필리핀에서 귀국하지 않고 있는 박씨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지명 수배하고 인터폴에 수사 공조를 요청했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이후 서울경찰청 소속 현직 경찰관 김모씨는 1000만원을 받고 이 조직 간부의 수배여부 등을 조회해줬다가 불구속 입건되기도 했다.
검찰은 현재 파악된 피해금액은 40억여 원이지만 범행일지와 환전금액 등을 감안하면 총 피해금액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검찰이 실제 압수한 이들의 통장에는 2만여 명으로부터 400억여 원이 입금된 것으로 조사됐다.
또 검찰은 조직원들이 사용한 100여개 인터넷 전화회선을 차단했다. 향후 발신번호 변경사실 알림 서비스 시행, 공공·금융기관 전화번호로 변경된 전화 차단제도 확대 실시 등 제도 개선을 관련 부처에 건의할 예정이다.
대출 희망자 예상질문
대처요령 교육도
박씨 등은 행정부처가 만든 보이스피싱 방지 대책 문건을 입수해 이를 역이용하는 새로운 범행수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범행은 교육부터 시행까지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대출 희망자의 예상질문과 상황별 대처요령 등을 담은 매뉴얼과 상급자의 실제 범행과정을 녹음한 음성파일을 이용해 신입 조직원에 대한 교육도 이뤄졌던 것이다.
범죄 수익금은 총책인 박씨와 얼굴 노출 위험이 큰 인출책이 각각 30%씩 챙겼고, 유인책과 대포통장 모집책 등이 나머지를 나눠 가졌다. 박씨는 지난해 3월 콜센터 관리를 위해 중국으로 출국했다가 현재는 필리핀에 도피 중이다.
현재 검찰은 필리핀에 있는 박씨 등 조직원 21명을 지명수배하고 가명을 사용해 인적사항이 확인되지 않은 50여명을 추적 중이다.
앞서 검찰은 지난 3월 첩보를 입수해 내사에 착수한 뒤 조직이 사용하는 ‘대포계좌’와 연결계좌 등 1000여개 계좌를 추적, 전국 검찰·경찰에 있는 보이스피싱 고소·진정 사건을 확인하는 작업을 벌였다. 이와 동시에 조직원들이 사용하는 대포전화에 대한 통화내역 조회와 이메일 추적, 은신처 압수수색 등을 통해 조직의 전모를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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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